항공기 기내식을 공급하는 회사는 특별히 제작한 철제 상자에 음식을 넣어 비행기로 보낸다. 비행 중 식사 시간에 승무원이 통로로 밀고 다니는 그 상자를 말한다. 그 철제 상자 밑에 바퀴가 달려 있기는 하지만 음식을 가득 넣으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밀 때 어느 정도 힘을 주어야 한다.
그 철제 상자를 비행장으로 운반하기 위해 회사 트럭에 싣는 곳(디스패치 dispatch)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중년 여성이 그 철제 상자를 밀고 있기에 도와주려고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넌 여자잖아.”
그러자 그 중년 여성이 정색을 하고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너, 그렇게 말하면 차별(discrimination)이야.”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단어가 아니었는데도 그녀의 ‘디스크리미네이션’ 발음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즉시 그녀가 정색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약하다’는 것을 전제로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인종, 성별, 나이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한 첫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는 성 차별적인 용어들이 꾸준히 정리되어왔다. 항공기 객실 승무원 중 남성을 스튜어드(steward)라고 하고 여성을 스튜어디스(stewardess)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남성의 steward 뒤에 ess를 붙여서 여성을 뜻하는 stewardess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듯이 영어 단어 자체에서 남성 중심 사고가 드러난다. 그래서 플라이트 어탠던트(flight attendant) 또는 캐빈 어탠던트(cabin attendant)로 바꾸었다. 이 표현에는 남성 여성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의장을 뜻하는 체어맨(chairman)에서도 나타난다. 뒤에 man이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체어맨은 의장이 남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약 의장이 여성이라면 남성을 뜻하는 man 대신에 여성을 뜻하는 woman을 사용해서 체어워먼(chairwoman)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 표현도 성 중립적 표현인 체어퍼슨(chairperson)으로 바꾸어 부른다.
남성을 체어맨, 여성을 체어워먼이라고 부르던 것처럼 남자 판매원을 세일즈맨(salesman)으로 부르고 여자 판매원을 세일즈워먼(saleswoman)이라고 불렀다. 이 또한 중립적인 표현인 세일즈 레프리젠타티브(sales representative) 또는 세일즈 클럭(sales clerk)이라고 부른다.
우체부는 대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메일맨(mailman)이라고 부르지만 가끔 여자 우체부에게 메일워먼(mailwoman)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미국 우정국의 공식 표현은 메일 캐리어(mail carrier)인데 여기에는 남성 여성 구분이 들어있지 않다.
성을 기준으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는 차별은 인종 차별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은 그 뿌리가 깊고도 넓다.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all men are created equal)고 적었지만 거기 적힌 사람(men)은 백인 남성을 뜻하는 것이고 여성도 흑인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의 흑인과 여성은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 연방 공휴일로 지정된 노예해방일 준틴스(Juneteenth)는 1865년 6월(June) 19일(Nineteenth)에 텍사스주 갤버스턴의 노예들이 미국 노예 중 마지막으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1863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해방선언이 공표된 후 무려 2년 반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다.
노예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흑인이 평등하게 대우받은 것은 아니다. 흑인의 인권은 1955년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지시에 따라 세 명의 흑인은 자리를 내주었으나 용감한 여성 로사 파크스(Rosa Parks)는 이를 거부하였다. 파크스를 체포했다가 석방한 공권력과 1900년에 제정된 분리에 관한 조례에 저항하는 의미로 흑인들은 몽고메리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시작했다. 마틴 루터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 목사도 그 운동에 참여했다. 1년 넘게 지속된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이 있고 나서야 흑인의 인권과 권익이 조금 개선되었다.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이 일어나 맞서는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라는 윌리엄 프레데릭 홀시의 말이 생각난다.
2018년에 그린북(Green Book)이라는 미국 영화가 나왔다. 그린북은 1950년대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지방에서 흑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숙박 장소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 영화에서 뛰어난 실력의 흑인 피아노 연주자가 순회 연주회 중에 어떤 대우를 당하는지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파크스와 킹 목사로 인해 그나마 흑인 인권이 보장되기 시작한 것이 불과 70년 전의 일이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부터는 9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흑인 이외의 유색인종은 그동안 있어왔던 흑인들의 투쟁 결과로 그나마 이 정도까지 온 것이다. 즉 인권을 위한 흑인들의 투쟁과 희생에 편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한인도 정치력 신장을 통해 차별 철폐의 편승을 넘어 동참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앞에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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