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박자박 소웁탐방 - 평창 대관령면 선자령·하늘목장·발왕산
장마 아닌 장마가 계속되던 지난 18일, 물기 머금은 지면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공기도 대관령에선 한풀 꺾이는 듯했다. 한낮 기온 22도, 보송보송하다면 과장이지만 저지대만큼 끈적거리지는 않았다. 능선을 기어오르는 바람 속에 가을이 감지된다. 하늘까지 맑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연의 조화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대관령(832m)에서 선자령(1,157m)까지 백두대간 능선을 걸었다. 겨울 눈꽃 산행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간직한 코스다. 약 5.5㎞를 걸으면 고도는 300m 정도 높아진다. 산행으로는 아주 쉬운 편이다. 1,000m 고산의 시원한 풍광과 신선한 공기까지 듬뿍 담을 수 있으니 가성비로는 이만한 길이 없다.
■천연림과 인공조림 혼재된 순탄한 길
새 길이 나고 잊힌 옛길에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선자령 등반은 옛 영동고속도로 서울방향 휴게소에서 출발한다. 맞은편 강릉방향 휴게소 뒤편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능선 위에 ‘동해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높이 10m, 163톤의 거석이다. 1975년 기준 국내 최대의 기념비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몸돌은 보령 웅천의 오석, 지붕돌은 익산 황등산의 화강석으로 제작했다. 몸을 꼰 용이 여의주를 품고 있는 형상의 옥개석에는 ‘민족의 대동맥’이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이 구간 영동고속도로는 2001년 대관령나들목에서 강릉분기점 구간을 확장 개통하면서 456호선 지방도로로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기념비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주변에 잡풀이 무성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오석에는 덕지덕지 글자를 때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뒤편에는 ‘해발 865m’라 쓴 팻말이 반쯤 기울어진 채 잡풀에 가려져 있었다. 기념비의 성격을 알리는 표석도 지붕돌이 떨어져 나간 채 방치되고 있었다. 옛것을 되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가까운 과거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
선자령 등산이 시작되는 서울방향 휴게소는 대관령 양떼목장 방문객이 주로 이용한다. 차는 많지만 등반객은 소수다. 출발지점부터 길이 갈라진다. 왼편은 잘 포장된 도로이고, 오른편은 완만한 계단으로 시작되는 흙길이다. 약 1.2㎞ 떨어진 국사성황사까지 연결된 포장도로를 택했다. 완만한 오르막길에 이따금씩 차들이 오가지만 성가실 정도는 아니다.
도로를 기준으로 왼편은 자연 그대로의 천연림이 울창하고, 오른편은 인공조림지다. 검푸른 침엽수림이 산산한 기운을 풍긴다. 오랫동안 화전민들의 농경지였던 땅에 1976년부터 10여 년간 전나무 잣나무 종비나무 낙엽송을 심어 방풍림을 조성한 성과가 조금씩 가시화하는 중이다. 바람이 심한 고지대라 40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아직은 키가 크지 않은 편이다. 세월이 흐르면 독일 남서부의 흑림(Schwarzwald) 못지않은 멋진 경관으로 자랄 것 같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국사성황사가 있다. 대관령 서낭을 모신 신당과 산신각 두 개의 당집이 우거진 숲속에 포근하게 안겨 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대접받는 통일신라의 범일 국사(810∼889)를 모신 사당이다. 어머니가 샘물에 뜬 해를 마시고 잉태했다는 탄생 설화를 지닌 인물이다. 강릉 지역의 풍수해를 막기 위한 사당이 이 높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이유가 뭘까.
국사성황사에서 나무 계단으로 난 길을 조금만 오르면 다시 능선길이다. 고개 너머로 대관령 옛길이 이어진다. 대관령은 오래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로, 특히 영동 지역 주민들에게는 서울로 가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길을 이용한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니 강릉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구름도 넘지 못하는 1000m 백두대간 능선
능선에서 짧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숲을 통과한다. 중간쯤에 다시 잠시 갈림길이 나타났다가 합쳐진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전망대에 닿는다. 서쪽으로는 고원평탄대지인 올림픽 도시 횡계 읍내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맞은편으로는 까마득한 발아래 강릉 시내와 경포 앞바다까지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횡계 쪽은 시야가 트여 올림픽 스키점프대 뒤로 발왕산 능선까지 한눈에 잡혔지만, 동쪽은 짙은 구름에 가려진 상태였다. 구름도 쉽게 넘지 못하는 산줄기, 기후도 생활양식도 영동과 영서로 구분하는 이유가 또렷이 확인된다. 구름바다 아래의 강릉 시내와 경포 앞바다 풍경을 머릿속에만 그린다. 능선부터 펼쳐지는 운무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니 아쉬움이 없다.
산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1,000m가 넘는 고원인데도 습기를 머금은 숲에 생기가 넘친다. 물봉선 산박하 마타리 동자꽃 산비장이 여로 개쉬땅나무 개미취 각시취 등 온갖 들꽃들이 어둑한 숲을 밝히고 있다. 들꽃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야생화 천국이자 천상의 화원이다. 다양한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고원 숲길을 통과하면 180도 다른 풍광이 기다린다.
풍력발전 바람개비가 줄지어 선 능선 주변에 거칠 것 없는 초지가 형성돼 있다. 억새와 속새 등 볏과 식물들이 거센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지나온 길이 생태의 다양성을 간직한 모습이라면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능선과 초원으로 형성된 단순미가 돋보인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마음속 잡동사니까지 훌훌 털어낼 풍광이다.
선자령 정상 바로 아래에서 몇몇 등산객이 텐트를 펴고 밤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경도 기후도 시원한 곳이니 마냥 부러울 법한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정식 캠핑장도 아니고, 보다 풍력발전기에서 나는 소음이 생각보다 심하다. 넓은 지역으로 퍼져서 산행 중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밤새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현명한 처사는 못 된다. 선자령의 이국적이고 광활한 풍광을, 1,000m 능선의 가을 바람을 가슴속에 담아 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산행이다.
■산꼭대기까지 이렇게 쉽게… 트랙터 마차 탈까, 케이블카 탈까?
선자령 탐방로는 급경사가 거의 없어 등산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왕복 11km,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산행이 부담스러운 사람도 백두대간 능선의 시원한 풍광을 즐길 방법이 있다. 물론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선자령 정상 부근 초지는 하늘목장 소유다. 옛 한일목장으로 40년 동안 외부 출입을 제한하다 2014년 관광지로 개방했다. 선자령 능선 서쪽 사면에 하늘목장 주차장이 있다. 입장료(성인 8,000원)를 내고 목장으로 들어서면 산자락에 양떼 목장이 그림처럼 조성돼 있다.
먹이주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인근에 트랙터 마차(5,000원)가 대기하고 있다. 15분이면 해발 1,000m 하늘마루전망대에 닿는다. 하늘마루는 선자령에서 뻗은 또 다른 능선이다. 산마루가 초지여서 시린 풍광이 펼쳐진다. 능선으로 부는 바람에 들풀이 눕는다. 사진 찍기 좋도록 알록달록한 벤치와 조형물도 설치해 놓았다.
하늘목장은 관광시설로 더 유명하지만 여전히 젖소 400여 마리, 면양 100여 마리, 말 40여 마리를 방목하며 우유를 생산한다. 트랙터 마차는 전망대에서 약 15분간 머물다 내려오면서 2~3곳에 정차해 목장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울타리 안에서 양과 뛰놀 수 있는 체험, 전문가와 함께하는 승마 체험, 송아지에게 먹이 주기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마차를 타고 바로 내려오기보다 중간 정거장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도 운치 있다. 자연의 숲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게 이 목장의 최대 장점이다. 너른풍경길, 가장자리숲길 등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걸으면 원시림 속 야생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선자령에서 횡계 건너편으로 보이는 발왕산에도 쉽게 오르는 방법이 있다. 용평리조트에서 발왕산 케이블카(왕복 2만5,000원)를 타면 약 15분 만에 정상(1,458m) 바로 아래 지점에 도착한다. 길이 3,710m의 케이블카에서 보는 풍광도 장관이다. 대부분 케이블카가 끝없는 오르막인 데 비해, 이 케이블카는 능선을 넘을 때마다 내려갔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한다. 발아래 펼쳐지는 원시림이 장관이다.
발왕산은 ‘왕의 기운을 가진 산’이라는 뜻이다. 웅장한 산세와 더불어 예부터 기운이 영험한 명산으로 꼽힌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정상으로 연결되는 숲길을 비롯해 3개의 ‘기(氣) 로드’가 조성돼 있다. 케이블카 정거장 위의 스카이워크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로 아찔함을 선사한다. 주변에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이 있지만, 최고는 죽어서도 꼿꼿한 수형을 유지하고 있는 주목이다. 검고 곧은 가지 뒤로 선자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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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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