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연어를 생각한다. 평생 의사로 활동한 허만하 시인이 말한 ‘연어의 필사적 귀향’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연어의 본능적 꿈’에 대해 떠올린다. 연어는 왜 바다로 가는가. 오랜 시간 품었던 의문이다. 1세대 과학 전도사로 활동하며 대중저술에 매진한 권오길 교수의 책 <별별 생물들의 희한한 사생활>에서 힌트를 얻었다. 연어의 치어인 스몰트(smolt)는 강에서 태어나 얼마간 머물다가 바다로 간다. 풍부한 먹이를 찾아서 간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바다로 가서 덩치를 키운다. 먹잇감이 적은 강에 남았다면 체격을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연어과인 산천어를 떠올리면 쉽다. 바다로 가지 않고 강에 남은 산천어는 몸집이 작다. 그렇다. 연어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강을 뒤로하고 바다로 간다.
내로라하는 혁신가들이 실리콘밸리로 모여든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리콘밸리로 온다. 개중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해 퇴장(exit)하겠다는 속내를 숨기고 오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윤 극대화를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기업은 없다. 돈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니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업가일지언정 혁신가는 아니다. 섣부른 개인적 단정일까. 하릴없이 권위를 빌려야겠다. 현존하는 최고 혁신가는 일론 머스크다. 머스크는 왕성한 활동을 하는 현역이므로 여전히 시험대에 올라 있다. 평가를 유보한다. 죽음을 통해 역사로 남은 혁신가의 편지를 엿본다.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유언과 다름없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기업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회사를 시작했다가 매각이나 기업공개를 통해 현금이나 챙기려 애쓰면서 자신을 기업가라고 부르는 이들을 나는 몹시 싫어한다. 그들은 사업에서 가장 힘든 일, 즉 진정한 기업을 세우는 데 필요한 일을 할 의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두 세대 후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표상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영속하는 기업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어판에서는 몹시 싫어한다를 몹시 경멸한다로 번역했지만 원래 표현은 hate다. 싫어하다든 경멸하다든 선택은 읽는 사람에게 맡기겠다. 사실 이 편지에서 중요한 부분은 기업가라 주장하는 그저 그런 사람들에 대한 냉소가 아니다. ‘무언가를 표상하는 기업’을 구축하려는 그의 끊임없는 추구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만 영감을 주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상 삶을 지속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언가를 표상하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 한두 세대 후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표상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이가 혁신을 거듭한다. 따라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소수의 창업가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라 내 삶의 혁신을 이루려는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실리콘밸리를 성공신화로 해석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현지생활 2년을 향해가는 지금, 중간정리한 결론은 실리콘밸리는 성공신화가 아니라 성장신화다. 내가 정의하는 혁신가는 일회적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일관된 가치를 키워나갈 수 있는 인물이다. 한 번 더 권위자의 말을 빌리겠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의 저자 짐 콜린스는 “인생이란 갱생과 성장의 과정이다(Life should be about renewal and growth)”고 말했다. 기업가로서, 아니 직업인으로서, 아니 생활인으로서 우리는 매일 출발선에 선다. 어제의 전진이 오늘의 원점이 된다. 환희에 가득찼던 어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오늘이다. 혁신가는 그럼에도 자신을 새롭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연어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실리콘밸리에 왔다. 커다란 나라에서 생각의 몸집을 키우려 했건만 커다란 인물의 성장신화에 압도된 채 부유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탐색 중인 위대한 혁신가들이 한결같이 무형적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비관적인 생각을 버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오리건(Oregon) 정신을 말한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모든 일에 첫날의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데이원(Day 1) 정신을 내세운다. 스티브 잡스는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을 읽어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제품으로 구현”하는 게 애플의 존재가치라고 했다.
요며칠 우울했다. 과연 연어처럼 일관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떡해야 할까. 혁신가들의 마음이라도 빌려야겠다. 비관적인 생각을 버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모든 일을 초심자 입장에서 접근하자. 내 존재가치는 아직 적히지 않은 것을 적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쓰는 데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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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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