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교회 속회모임에서였다. 식사후 여자분들은 다이닝룸에서 나눌 얘기들이 많았고, 남자들은 새로 들인 패밀리룸의 대형 프로젝트 TV로 미식축구를 함께 봤다. 시즌 개막전 시범경기였고 제철의 끝물인 수박이 후식으로 나왔다. 올드타이머 한 분한테서 수박과 풋볼 얘기를 듣게 됐다.
“수박 훔쳐 들고 뛰듯이” 옆구리에 공을 끼고 돌진하는 흑인 러닝백을 보며 백인들끼리 낄낄대는 표현이라고 했다. 20년 전인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가 했다. 미국 수박이 길쭉한 게 럭비공 닮았다는 건가?(씨없는 수박과 당도 높은 슈가베이비는 둥글고 씨있는 수박은 긴 타원형이다.) 백인들은 수박을 안 먹나? 그게 뭐가 웃기지?
워싱턴 인근에 살다보니 남북전쟁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는 중에 수박 먹는 흑인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삽화들과 마주쳤다. 메시지는 뚜렷하다. 수박만 있으면 헬렐레 환장하는 것들…. 흑인들을 폄하하는 인종멸시 스테레오타입. 19세기 시커먼스류 민스트럴 악극단 시대에 백인청중들의 박장대소를 이끌어내던 우스개 소재였던 것이다.
무더운 남부의 농장, 끝없는 노동의 일상에 단물 가득한 수박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감로수 아니었을까. 농장주들도 자투리땅에서의 수박재배를 묵인 혹은 방조, 노예노동을 유지하는 요소로 활용했을 터.
시발은 노예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이 본격적으로 수박재배에 나서면서부터. 흑인들에게는 수박이 자유의 상징인 것이다. 반면 흑인 자영농가의 출현에 위협을 느낀 남부 백인들은 불안한 속내를 수박 혐오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천사가 뭘 먹는지 알고 싶으면 수박을 맛보아라”고 마크 트웨인이 말했듯이 수박이 천대 당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백인들이 키운 편견은 수박을 천한 과일로 몰아갔다. 내 참 물이 많은 수박을 깔끔 떨며 먹으려고 한다면 그게 모자란 것이지. 나이프로 썰어 포크 찍어 먹으랴.
손에 질퍽질퍽 과즙이 묻고, 씨를 툭툭툭 뱉게 되고, 혼자 먹지 못하고 여럿이 같이 먹게 되는 수박의 특성을 게걸스러움으로, 무지몽매한 행태로 몰아간 것이다. 여름날 늦은 저녁 골목에 돗자리 깔고 이웃이 함께 퍼질러 앉아 수박을 쪼개며 웃고 또 웃고 그러면서 더위를 넘겨내던 귀한 추억이 누군가에게는 조롱 당할 미개함이라니. 내가 다 화가 나네.
시커먼스류의 조롱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학창 시절 귀에 익은 포스터의 노래들을 미국에 와서 오히려 듣지 못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럼에도 수박과 흑인에 대한 이 못된 낙인은 아직도 남아 있어 몇 해 전 오바마의 백악관에 수박맛 치약을 권하는 만평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특정음식으로 특정인종을 엮어 비하하는 못된 예는 더 있다.
역시 흑인을 대상으로 한 쿨에이드가 그렇다.
“You’re dipping into the Kool-Aid and don’t know the flavor.”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범죄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중에 (흑인인) 상원의원 부커가 (백인인) 바이든에게 아무리 아는 척 해도 당신은 그 현장 흑인 동네의 실상을 알 수 없다는 펀치로 날린 말이다.
쿨에이드는 과일주스가 아닌 과일맛 주스다. 가루주스. 60년대 한국에서 손님 오면 ‘오렌지주스’라고 물에 타서 내오던 탱(Tang) 가루를 떠올리면 된다. 머큐리 우주선에 음료로 채택되어 유명해진 탱보다 1920년대에 등장한 쿨에이드는 연조가 더 깊다.
따봉 엄지척과 더불어 ‘진짜’ 오렌지 주스가 등장하면서 한국에서 탱 가루가 사라졌듯이, 가루주스는 과일주스를 마실 형편이 안 되어 찾는 빈자의 음료로 자리매김됐다. 가난한 도심의 빈곤층, 이 미국 땅에서 누구겠나, 그렇게 흑인들의 음료라는 인식이 박힌 것이다.
그리고는 조롱이 뒤따른다. 색깔별로 여러 과일맛의 쿨에이드가 나오는데, 이를테면 흑인들은 포도맛 대신 보라맛(purple)을 좋아한다나, 이런 식이다.
이런 배경을 모르니 웃지 못할 해프닝이 대학에서조차 벌어진다. 언젠가 뉴욕대에서 흑인 역사의 달 기념행사에 남부 음식이라며 차려놓고 음료로 떠억하니 빨간색 쿨에이드와 수박맛 음료를 내놓아 흑인 참석자들을 경악케 했던 적이 있다. 부커처럼 당사자의 자조적 표현과는 다른 것이다.
닭튀김, 수박처럼 오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난 그 하나로 누군가를 규정하는 가벼운 사고방식, 참 서글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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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 전 언론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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