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되찾은 날을 기리며 쓴다. 지난 15일은 광복절이었다. 새삼 국가정체성을 되새기며 내게 대한민국은 무엇인지 지난 몇 년을 톺아본다. 10여년 전부터 이란과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 살아왔으므로 비교할 만한 사례연구 대상이 쌓였다. 시계를 5년 전으로 돌린다. 2017년 9월, 나는 테헤란에서 출발하는 이스탄불행 터키항공에 앉아 있었다. 이란과 터키는 국경을 접한 이웃답게 오가는 사람이 늘 많았고 그날도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내 자리는 맨 뒷줄 가운데 좌석이었다.
터키맥주 에페스(Efes)를 마시고 싶어 승무원에게 부탁했다. 테헤란 구간에서는 알코올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터키는 세속주의 국가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애써 존중한다는 듯이 술을 내주지 않았다. 이스탄불 시내에 들어가면 에페스 생맥주부터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야겠다고 생각하며 단념했다. 정작 왼쪽에 앉은 사람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먼저 말을 걸었다. 내 눈에 그는 분명 이란 사람이었다. 페르시아어(Farsi)로 물었다.
“베 이스탄불 미린(이스탄불 가세요)?” “모사페라테 커리 에(출장인가요)?”
그는 짐짓 놀라며, 이스탄불을 경유해 런던으로 간다고 말했다. 이란말은 어떻게 배웠냐고 묻길래, 테헤란에 온 지 꽤 됐으며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란을 떠난 지 30년이 넘는 이란계 영국인으로 버밍엄에 살고 있었다. 비즈니스맨이자 엔지니어인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려 영국과 이란을 잇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 기술을 바탕으로 이란회사와 합작해 대규모 프로젝트 입찰을 따내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 기업의 이란 진출을 돕고 있다고 말하며 명함을 건넸다. 그는 이란 동료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것 같다며, 연락처를 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나는 출장을 마치고 무사히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스마트폰을 켜자 그의 동료 하산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하산은 자신의 사업장으로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장은 테헤란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진 쉬라즈(Shiraz)에 있었다. 쉬라즈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포도주의 원조나 다름없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9세기만 해도 쉬라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중동 너머 이름을 날렸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기 전만 해도 쉬라즈에 있는 포도주 양조장은 300개에 달했다. 하지만 혁명을 계기로 이란 내에서 와인 생산은 전면 금지됐다. 13세기에 프랑스로 건너간 쉬라즈 포도 품종은 호주와 남아공까지 넘어가 대량 재배되면서, 지금은 이들 나라가 쉬라즈 와인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쉬라즈 공항에는 하산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캐나다에 오래 거주하면서 한국인들과 많이 어울렸기에 쉽게 알아본다고 했다. 나도 이제 이란인과 터키인은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고 거들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만나자마자 친해진 느낌이었다. 우리는 곧장 사무실로 갔다. 직원들과 인사한 다음, 하산은 회사 소개를 했다. 마침 점심때라 케밥(Kebab)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좋은 한국기업을 정성껏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테헤란에서 답례하겠다고 덧붙였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공장을 둘러보았다. 하산이 독일에서 갓 들여온 수억 원 넘는 기계를 자랑하길래, ‘메이드 인 코리아’도 좋으니 앞으로 한국산으로 알아봐달라고 농담을 건넸다. 우리는 깔깔거렸다.
공장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산은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쉬라즈 교외의 유원지로 가서 식사를 하며 한국과 이란을 이야기했다. 하산이 캐나다에 있을 때 자식들에게 개인과외를 시키기로 유명한 두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과 이란 이민자들이었다고 했다. 이란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이란에 살면 살수록 한국과 이란의 비슷한 점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하산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고 나를 치켜세웠다. 나는 괜히 가슴이 울컥해 이란도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거들었다.
어린 시절, 우리보다 힘세고 잘사는 나라를 보면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위축됐다.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달려야 한다며 주먹을 꽉 쥐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봤을 법한 ‘한국인 콤플렉스’였다. 낯선 땅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수록 우리나라가 그리웠다. 모국에 대한 객관적 시각보다는 내 나라에 대한 운명적 갈망이 사고체계를 지배했다. 이란에서 바라본 우리나라는 유별나면서도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겪지 못한 삶의 형태도 많다. 어쩌면 나는 다른 세계에 살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한국인 콤플렉스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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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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