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할리웃 보울에 두 번 갔었다. 7월17일의 ‘발퀴레’ 공연과 26일의 조성진 협연 콘서트가 그것이다.
구스타보 두다멜 LA 필하모닉 음악감독은 매년 여름 보울 무대에 오페라를 꼭 한 편씩 올리는데 올해는 바그너의 4부작 ‘링 사이클’의 두 번째 오페라 ‘발퀴레’ 3막을 연주했다. 들뜨고 즐겁고 산만한 할리웃 보울에서 길고 무겁고 심각하기 짝이 없는 바그너의 ‘링’이라니, 도무지 뜬금없다고 느껴지는데도 보러갔던 이유는 유발 샤론(Yuval Sharon)이라는 희대의 연출가가 무대감독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LA 출신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디렉터로 손꼽히는 샤론은 언제나 기발하고 독창적인 무대를 연출하기로 유명한데 이날도 과연 디지털 특수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했다. 영화 촬영에서 사용되는 녹색배경화면 테크놀러지, 가수들은 무대 위의 그린 백드롭 앞에서 노래만 하는데 대형 스크린에서는 이들이 어마무시한 배경 속에서 나르고 달리고 노래하는 라이브 비디오게임처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무대가 특별하고 짧은 발췌 공연이어도 바그너의 오페라는 누구나 즐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모처럼 휘파람 불며 따라나섰던 사람의 분노와 불만이 여간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성진의 할리웃 보울 데뷔 공연은 참 좋았다. 우선 프로그램이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 ‘운명’이었으니 일단 기본 만족도는 보장된 콘서트였다. 7년전 쇼팽콩쿠르 우승 이후 탄탄한 연주력으로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른 조성진은 이날 두다멜 지휘의 LA필과 기가 막힌 호흡을 이루며 웅장한 ‘황제’ 협주곡을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나게 연주했다. 더 좋았던 건 계속되는 기립박수에 앙코르로 선사한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Moments musicaux)이었다. 1분30초 정도의 짧은 곡이지만 음색과 강약이 계속 변하는 영롱한 작품인데 조성진이 이를 얼마나 반짝반짝 섬세하게 연주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한인들의 티켓 파워였다. 본보가 미디어 스폰서였던 이 행사에 한인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지 마치 우리들의 축제 같았다. 아마 보울 측에서도 적잖이 놀랐을 터,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디즈니 홀과 할리웃 보울 무대에 초청되는 한국인 아티스트가 더 늘어날 것이고, 우리들의 자긍심이 고양되는 문화생활도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제 할리웃 보울 섬머 시즌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오는 9월말까지 아름다운 클래식은 물론 신나는 팝과 록도 있고, 매혹적인 재즈와 흥겨운 레개, 재미있는 영화음악 등 후끈한 여름밤을 시원하게 식혀줄 공연들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이 수많은 프로그램 중 거슬리는 공연이 딱 하나 있다. 오는 8월12~13일 두차례 공연되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그것이다.
‘불꽃놀이와 차이콥스키 스펙태큘라’라는 제목 아래 펼쳐지는 이 공연은 매년 여름 할리웃 보울의 붙박이 프로그램이다. 그랜드피날레에서 승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16발의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밤하늘로 화려한 폭죽을 펑펑 쏘아 올리는 이 공연은 거의 항상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좋아서 1969년 주빈 메타가 시작한 이래 한해도 빠짐없이 계속돼온 ‘효자상품’이다.
그런데 올여름 이 작품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1812년 서곡’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이다.
지금 동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이 한창이다. 지금까지 1만4,000여명의 우크라이나 군인과 민간인이 숨졌고, 900만명이 넘는 난민이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이런 시점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자축하는 음악을 대포와 축포까지 쏘면서 연주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까? 그것도 전적으로 우크라이나 편에 선 미국에서 말이다.
이 작품은 1880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차이콥스키에게 의뢰하여 6주 만에 완성된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차이콥스키는 이 곡이 “너무 시끄럽고 야하고 예술적인 쓸모가 없는 소음만 가득한 졸작”이라고 스스로 혹평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 음악이 미국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음악으로 추앙돼 미 전역에서 7월4일 독립기념일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다. 1970년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7월4일에 찰스 강변에서 연주한 후부터의 전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올해 독립기념일에는 러-우 전쟁을 의식한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이 서곡 대신 다른 미국음악이나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했다는 소식이다. 1978년부터 매년 연주해온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뉴욕, 오하이오, 인디애나, 코네티컷, 위스콘신 주의 수십개 연주단체들이 이를 보이콧했다는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런던의 로열 필하모닉을 위시해 우크라이나 편에 선 여러 서방국가의 오케스트라들도 ‘1812년 서곡’의 연주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모든 오케스트라가 이 행동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전쟁의 민감성은 알지만 1812년의 러-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며 정치적 행보보다는 전통을 이어가는 곳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할리웃 보울이 이런 시류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도 없이 연주를 진행하는 것은 민감하지 못한 처사로 보인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는 미사일과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데 러시아의 승전을 기념하는 음악을 축포와 함께 꼭 연주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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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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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이는 할리웃보올이있어서 가끔 직접 듣고 보고할 수있는 최고의 전당입니다. 클래식만이 아니고 팝, 록 컨트리 뮤직등 무대에 올려질때 넘 좋습니다. 제가 마지막 가본 가수는 탐페리! 말씀을 듣고보니 8/12-8/13 일 음악은 조금 지체해도 좋을듯 싶은데...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맘이 많이 아픈데...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홀라웃 플래너가 될수있다면 좋겠습니다. 느낌을 공유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