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연방 헌법’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문 헌법이다. 이 헌법이 탄생한 1787년 9월 미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독립 전쟁은 1781년 조지 워싱턴이 요크타운에서 영국의 콘월리스 장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승리로 끝났고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공식으로 인정 받았으나 그 때까지 미국은 사실상 중앙 정부 없이 13개 주의 연합체로만 존재했다.
이들을 한데 묶는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의결 사항은 만장일치가 원칙이었고 13개 주 연합체는 징세권이 없어 재정은 각 주의 자발적인 기여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무능하고 유약한 연합 체제 아래 ‘셰이스 반란’ 등 민란이 일어나고 유럽 열강의 위협이 계속되자 강한 중앙 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마련되고 13개주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연방 헌법’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헌법을 만든 사람들의 고민 거리는 강한 중앙 정부는 필요하지만 이 정부가 국민을 억압할 정도로 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도 모국 정부의 자의적인 징세 등 횡포에 진저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연방 헌법’의 초안자들은 그 해답을 권력의 분립에서 찾았다. ‘미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헌법 최고의 해설서’라 불리는 ‘연방주의자 백서’(Federalist Papers) 51편에서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없을 것이다. 천사가 인간을 지배한다면 외적이나 내적인 통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정부를 만들 때 큰 어려움은 첫번째, 정부로 하여금 피치자를 통제하도록 하고 그 다음, 스스로를 통제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그 방법으로 ‘야심이 야심을 맞상대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권력의 분립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영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국은 1688년 왕 제임스 2세가 나라를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전제 국가로 만들려 하자 그의 딸 메리와 네덜란드 사위 윌리엄을 불러 들여 제임스 2세를 내쫓고 이들을 공동 군주로 세웠다. 그 대신 이들로부터 왕은 세금을 매길 때 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했으며 자유 선거와 언론의 자유, 잔인하고 특이한 형벌의 금지, 개신교의 무기 소유권 등을 약속받고 이를 문서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이다. 미국 헌법에는 ‘권리 장전’의 정신은 물론 문구까지 그대로 등장할 정도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권리 장전’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영국 역사의 산물이다. 그 기원은 존 왕이 영주들과 체결한 ‘대헌장’(Magna Carta)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왕 중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 존은 거듭된 패전으로 부모가 물려준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잃고 만다. 그리고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영주들에 대한 일방적 징세로 메우려 하자 이들은 들고 일어나 ‘영주 회의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헌장’에 도장을 찍게 만든다. 여기에는 왕이 이 약속을 어길 때는 왕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치욕적인 조항도 들어 있지만 이들의 위세에 눌린 존은 1215년 6월 15일 윈저 성이 멀지 않은 템스 강 인근 러니미드에서 옥새를 찍고 만다.
원래 영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이 문서는 훗날 모든 ‘자유롭게 태어난 영국 시민’의 권리로 확대 해석되고 영주 회의는 영국 의회의 모체가 된다. 이 문서는 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타협의 선례가 된다. ‘대헌장’과 ‘권리 장전’은 아직도 영국 불문 헌법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미국의 헌법은 이런 전통 위에 서 있다.
미 ‘독립 선언서’와 ‘연방 헌법’은 1789년 터진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헌법은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는 유럽 거의 모든 나라는 물론 세계 대다수 국가 헌법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 중에 대한민국 헌법도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17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진 지 74주년이 되는 날이며 올해는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 탄생 35주년이 되는 해다. 신임 국회의장은 또 헌법을 바꿀 때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자주 고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미국은 지난 235년 동안 헌법의 기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짧은 세월 동안 10개의 헌법을 가졌다. 개헌을 논하기 전 한국 헌법의 뿌리와 존재 이유를 성찰해 보는 것이 순서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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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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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단, 헌법을 자주 고쳐도 문제지만, 미국처럼 요지부동인 것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헌법이라고 볼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급변했죠. 군부독재시대, 민주화항쟁, 하나회 해체를 통한 본격적인 민주주의 실현 등등. 제대로만 고친다면 횟수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헌법이 현실에 잘 맞지 않는 게 있다면 고칠 것은 과감하게 고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