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 유가잡기 급한 바이든 증산 요청에 냉담’…인권문제 역공
▶ 이란 겨냥 ‘중동판 나토’도 논의 못 해…이스라엘·사우디 관계 개선도 요원
▶ “방문할 가치 있었나 의구심, 성과 증명에 수주∼수개월 걸릴지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함께 홍해 연안 제다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3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사진제공]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중동의 수니파 국가의 대외 정책은 흔히 '미국의 전통적 맹방'이라는 수식어로 요약되곤 했다.
하지만 16일 마무리된 이번 조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순방은 이 수식어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 분기점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듯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권 우선 정책의 '후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중동 순방에 나섰지만 원유 증산, 이란 핵 문제 대응, 아랍·이스라엘 관계 개선, 러시아·중국 견제, 우크라이나 전쟁 등 현안에서 사우디의 명시적 협조를 약속받지 못했다.
◇ 바이든 "증산 기대", 사우디 "논의 없어…산유량은 OPEC+ 결정"
미국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는 '키'였던 석유 증산은 이번 순방의 핵심 과제였으나 미국은 석유왕국 사우디에 구체적인 확답을 얻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16일 걸프협력회의(GCC)와 정상회담에서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에너지 생산업체들은 이미 증산했으며 향후 수개월간 벌어질 일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을 포함한 OPEC+의 8월 3일 회의 때 원유 증산 결정을 해줄 것을 기대하는 발언이었지만 사우디는 냉담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사우디는 이미 최대 생산 능력치인 하루 1천300만 배럴까지 증산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를 넘어서는 추가 생산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요구를 일축했다.
사우디와 증산 여력이 있는 국가로 꼽혀 왔으나 미 대통령 앞에서 '불가' 방침을 밝힌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글로벌 물가 폭등의 원인은 서방 주도의 친환경 정책에 있다며 다른 시각을 내비쳤다.
그는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비현실적인 에너지 정책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고 서방의 정책을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탄소 중립 정책을 강하게 밀어 붙이면서 화석 연료를 생산하는 산유국을 기후변화의 장본인으로 낙인했던 서방에 공격을 되돌려준 것이다.
파이살 알 파르한 사우디 외무장관은 아예 "정상회담에서 원유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일축하고 산유량은 미국의 요구가 아닌 OPEC+의 계획에 따를 것이라고 확인했다.
두 사람은 양국간 불화의 원인이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과 관련해서도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외신은 바이든 대통령이 개별 면담에서 암살 배후로 지목받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책임을 지적했으나 왕세자는 "개인적으로 나는 책임이 없으며 책임 있는 인사들에 대해서 조치를 취했다"고 반박했다고 전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더 나아가 미군의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포로 학대 사건과 팔레스타인계 미국 언론인 시린 아부 아클레 기자 피격 사건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 이스라엘과 '이란 연합방위 체계' 논의도 없어
'공공의 적'인 이란을 고리로 사우디, 이스라엘을 묶으려는 시도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14일 이스라엘 방문에서 "우리는 결코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 핵 저지는 이스라엘과 미국은 물론 다른 세계에도 중요한 안보 관심 사안"이라고 밝혔다.
또 16일 사우디 정부와 공동성명을 내고 이란이 '타국의 내정 간섭과 무장 대리세력을 통한 테러 지원, 역내 안보와 안정을 불안정케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 이를 억제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랍 정상들과의 회담에서는 관련 논의가 없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를 토대로 이란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연합 방공망, 이른바 '중동판 나토' 구축을 추진해왔고, 이번 순방을 계기로 구체화하려 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중동 국가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란 핵 저지라는 공동 목표를 두고서도 실무 협의로 나가지 못한 것이다.
사우디는 바이든 대통령 방문에 맞춰 이스라엘에서 출발한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유화적인 행동'이라는 해석이 나오자 "외교관계와는 상관없는 조치"라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하기도 했다.
◇ "구체적 성과 없어, 왜 갔나" 비판도
바이든 대통령은 중동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면서 러시아·중국 견제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세계가 더 경쟁적으로 되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 더 복잡해지면서 중동이 미국의 국익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며 "미국이 중동을 떠나 중국, 러시아, 이란이 그 공백을 채우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GCC 회원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도 적극 동참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서방과 '중·러 진영'이 나뉜 신냉전 시대에 중동 내 전통적 맹방의 '탈미(脫美) 중립화' 흐름을 막고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이 이번에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세계 패권을 위한 미국의 중장기 목표에 중동이 얼마나 호응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란은 바이든 대통령의 순방 기간에 '드론 전단'의 훈련 장면을 처음으로 공개하며 무력시위를 벌였고 중국은 "걸핏하면 제멋대로 중동의 일에 간섭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이 지역을 개조하려고 시도한다"면서 견제구를 날렸다.
순방이 끝나자 서방 언론에서도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간 미국이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는 혹평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무함마드 왕세자로서는 미국과의 냉랭한 관계 여파로 고립됐던 외교무대로 다시 나아갈 기회를 얻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중동 순방에서 성과를 냈는지 평가받기 위해서는 적게는 수주에서 수개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문가를 인용해 논평했다.
로이터 통신은 바이든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와 만남에서 '주먹 인사'로 관계 개선에는 첫발을 내디뎠지만 큰 성과가 없어 방문할 가치가 있었는지 의구심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시급한 현안인 원유 증산과 관련해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던 것은 세계 경제에 불확실성만 키웠다고 지적했다.
미국 민주당에 우호적인 성향의 뉴욕타임스(NYT)도 15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에런 데이비드 밀러를 인용해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인권, 러시아에 맞선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는 시점에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사우디의 지도자(왕세자)를 만나러 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왕세자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며 "이번 방문으로 왕세자의 지도력이 유효하게 됐고, 미국 대통령의 지위를 일련의 이익과 맞바꿨는데 그 이익의 대부분은 이미 사우디의 것이었다"라고 혹평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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