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 돈바스 점령에 전력 집중…우크라이나 인도적 참사 공분
▶ 서방·러 치킨게임 장기화 조짐…전황 교착될 수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하자 군사력이 크게 열세인 우크라이나가 패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서방의 지원 속에 우크라이나군이 강하게 항전했고 러시아군의 보급, 전투 전략상 허점이 드러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장기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군은 침공 사흘 안으로 우크라이나 북쪽 수도 키이우를 점령할 수 있다고 봤지만 오히려 북부 전선에서 퇴각했고 개전 100일이 지난 현재 동부 돈바스(루한스크·도네츠크주) 지역과 남부 해안도시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 러, 친러 반군지역 근거로 동부 돈바스 점령에 속도
키이우를 포기한 러시아는 4월22일 '2단계 작전'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의 세베로도네츠크 등 전략요충지인 소도시에 공세를 집중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도시를 포위해 무차별 폭격으로 초토화한 뒤 지상군을 투입해 점령하는 악명높은 전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지난달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도 우크라이나 병력의 최후 항전지 아조우스탈 제철소도 이런 전술로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는 '대리군'을 앞세워 전쟁 전 돈바스 지역의 3분의1 정도를 통제했으나 현재 루한스크주를 거의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도네츠크주에서도 마리우폴에 이어 북부 슬라뱐스크, 크라마토르스크 점령을 시도하고 있다.
전선이 120㎞ 정도로 좁은 지역 전투에서 러시아가 계속 우세하면 우크라이나로서는 돈바스 전체가 위태로워지게 된다.
러시아로서는 돈바스를 손에 넣으면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로 직접 이어지는 육로를 구축해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돈바스는 러시아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러시아는 이곳의 러시아계 주민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학살'을 막는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다. 그런 만큼 현재 러시아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자처하는 명분까지 챙길 수 있는 돈바스를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는 수도를 지키고 제2도시 하르키우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뒀지만 영토의 10% 정도인 돈바스에서 실지하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돈바스가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이후 휴전·평화 협상이 교착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러, 우크라 민간인까지 잔혹하게 살해…인도적 참사 공분
러시아는 침공 과정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을 대규모로 죽였다.
이 같은 전쟁범죄 논란은 개개인을 직접 겨냥한 살해, 도시를 포위한 뒤 자행한 무차별적 폭격 등 두 갈래로 나뉜다.
러시아군은 침공 초기 키이우 진격이 정체된 뒤 부차 등 외곽 도시에서 주민을 즉결처형 형식으로 집단학살한 정황이 잡혔다.
키이우주 경찰청에 따르면 부차에서 발견된 시신 1천구 가운데 650구에서 직접 사살 흔적이 발견됐다. 일부는 손발이 묶인 상태였다.
인구가 40만명이던 마리우폴에서는 주택, 병원, 학교를 가리지 않는 폭격으로 도시기능이 마비된 채 민간인이 죽어나갔다.
마리우폴 주지사는 도시 사방에 시신이 널렸다며 민간인이 무려 2만2천명 정도나 숨졌다고 추산했다.
러시아군은 집속탄, 열압폭탄, 백린탄 등 무차별 살상력 때문에 전쟁범죄 논란이 있는 무기를 사용한 정황도 포착됐다.
인도적 참사를 계기로 서방국가 정부와 기업은 일제히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전쟁범죄, 인류에 대한 범죄, 제노사이드(표적집단 말살) 혐의로 러시아군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달 27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민간인 4천31명이 숨졌고 이 중 261명이 어린이라고 집계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폭격과 잔혹행위를 피해 해외로 빠져나간 우크라이나인은 680만명을 넘었다.
◇ 점령 뒤 러시아화…살라미식 우크라 영토 잘라먹기
러시아는 태세 전환과 함께 전열을 재편해 동부의 기존 점령지를 거점으로 삼아 점령지를 서서히 조금씩 늘려가는 모양새다.
키이우, 하르키우 등 대도시에서 철수했지만 점령한 소도시에서는 주민, 행정체계, 문화를 러시아에 통합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헤르손에서는 5월부터 러시아 루블화가 법정화폐로 지정됐고 마리우폴, 헤르손, 자포리자에서는 주민에게 러시아 여권이 쉽게 발급됐다.
푸틴 정권을 대변하는 러시아 국영방송은 점령지의 언론을 대체해 주민들에게 러시아식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물리적 공격과 문화적 침탈을 아우른 이 같은 공세를 제노사이드(표적집단 말살)로 비난했다.
돈바스 지역도 초토화 뒤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헤르손, 마리우폴과 같은 과정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범위가 돈바스 내에서 얼마나 넓어질지, 돈바스를 넘어 우크라이나의 다른 부분까지 확대될지는 미지수다.
◇ 서방 무기 지원, 제재…러, 에너지·식량 무기화로 강경 대응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전비를 얼마나 오래 감당할 수 있을지를 변수로 지목한다.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계속 공급하고 경제 제재의 수위를 높이는 만큼 러시아의 상황도 점차 악화하고 있다. 개전 100일이 지났지만 우크라이나군이 여전히 강하게 저항하는 것도 러시아군으로선 큰 압박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곡사포, 무인기, 전투차량 등을 공급한 데다가 장거리 로켓 체계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석탄 수입 금지에 이어 30일엔 올해 연말까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의 90%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부분 금수에 합의했다.
러시아도 물러서지 않고 천연가스 공급 차단으로 에너지를 무기화했고 우크라이나 남부의 곡물 수출로인 흑해를 봉쇄해 서방에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멈출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아 극적인 돌파구가 없다면 양측의 '치킨 게임'은 상당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일부에서는 러시아의 보급 문제 때문에 돈바스 전투가 최후의 공방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가 기세를 몰아 진전하더라도 다시 수세에 몰려 전쟁이 교착에 빠질 수 있다며 병력과 장비가 줄어들어 돈바스 전투가 이번 전쟁의 마지막 주요 격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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