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PACHINCO’는 일단 책의 원작과 조금 다르게 각색이 되었다. 선자를 중심으로 일본에 살고 있는 손주 솔로몬과 주인공인 선자의 젊은 시절을 오가며 오버랩되는 시선과 사건의 공통된 부분을 믹스해서 시청자에게 차차 이해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드라마가 전개되었다. 책을 읽은 독자의 시선과는 정반대의 시대적 흐름으로 도입 부분부터 현재를 조명하는 미리 보기식 전개가 꽤나 흥미로워서 각색 부분의 천재성이 보여 과연 미국 평론가의 극찬을 받을 만하다.
특히 4세대에 걸친 다양한 시대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작가가 바라본 식민지 한국과 통치자 일본의 극에 찬 암울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중요한 점은 역사가 영웅 중심적인 추상적 즉,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국가간 권력 다툼이라든가 결과에 따른 정권 교체 같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복잡하게 얽혀 어려운 윗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결정으로 인해 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를 하루아침에 잃고 그 나라를 침략한 다른 나라 즉 일본 사람들에게 죄 없이 학대당하고 이유 없이 경멸당하고 마치 자기의 하인을 부리듯 함부로 대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옥죄게 하는 그러한 서민 중심의 이야기다. 더욱이 침략자의 나라에서 서러움을 받아야만 하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고증을 거쳐 실생활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희열과 감동을 주었다.
특히 지금의 러-우크라이나의 전쟁 시국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더욱 흥행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르겠다. 예부터 전쟁의 이유와 그 피해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받았던 그 상처들의 치유와 사과의 모든 과정을 재조명하는 일은 고스란히 후세들의 몫이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그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후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역사의 줄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증하고, 현대인이 지켜야만 할 선의 중도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잘못된 역사를 되짚어서 사실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후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일본처럼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독도 등 모든 걸 제치고라도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유 없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고 평생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게 사시다 지금은 단 몇 분만 생존해 계신다. 그분들은 지금도 꽃다운 어린 소녀적 시절을 송두리째 짓밟힌 일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드라마가 단순히 한국과 일본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을 겪은 다른 나라 사람들, 더 나아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우리 이민자들의 삶과도 연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의 나라보다 잘 사는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현지인에게 느끼는 열등의식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이민 1세대 부모의 삶을 통한 서러움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며 성취감으로 대신했을 것이고, 높이 오르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선자로 하여금 투영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작가가 써 내려간 선자는 이 작가 혼자만의 선자가 아니다.
한국을 떠난 모든 이방인이 선자이고, 선자의 울음이고, 선자가 희망이다. 나와 같은 이민자 그리고 전쟁을 겪었던 나의 윗세대들이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지금의 우리에게 그리고 윗세대들에게 조금의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이 같은 일을 피부로 직접 겪은 모든 이민자에게는 그 피땀 어린 노력이 드라마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서러운 한과 아팠던 과거를 회한과 위로로 전해 받은 셈이다.
한국인이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에 이름을 못 올리는 이유가 바로 한국말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쓰인 글을 영어로 그럴듯하게 번역해서 세계인의 머리에 읽히게 한들 우리 한국말로 이해하는 것처럼 감상적인 울컥함이 그대로 전해질까? 한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그 뉘앙스와 느낌을 살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한국말을 못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랬기 때문에 파친코가 세계적인 언어로 승화되었음에 다행스러움을 느낀다.
미국에서 파친코의 유명세를 가늠할 일들은 아주 많다. 물론 ‘오징어 게임’처럼 획기적으로 누구나 아는 드라마는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넷플릭스처럼 쉽게 접근하는 채널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시사회 때 티켓과 함께 나누어 주었던 것이 바로 무궁화 꽃씨였다. LA에서 미국인 손에 쥐어준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의 꽃을 상징하고 한국을 대변하는 ‘무궁화 꽃씨'라는 점에서 나는 무한한 영광을 느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류에 기름을 제대로 붓고 있는 파친코는 우리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는 문화 콘텐츠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떠난 모든 이민자에게 1세대의 척박한 땅에서의 아픔과 2세대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분노를 이해하게 해 주는 교훈적인 드라마다. 역시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인들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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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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