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풀내음이 영혼을 정겹게 흔들어 오는 계절이다. 알게 모르게 봄을 희망으로 포옹하고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나 보다. 외로울 때 슬프고 괴로웠던 그 나날들에 버릇처럼 봄을 흠모해 오지 않았던가.
봄은 확실하게 삶의 의욕을 잉태하고 꿈을 그려보게 만든다.
프랑스 어느 작가는 ‘인생은 기다림’이라고 했다던가.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학교 졸업을 기다리고, 가정을 이루고 번영을 기다리고… 그런 정도 작가의 서술이었는데 여기에 “삶은 봄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더라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을 텐데….
겨우 내내 봄을 기다렸던 꽃들, 더그우드(Dogwood), 라일락(Lilac), 매그놀리아(Magnolia, 목련)가 흐드러지게 핀 거리를 산책하며 행복감을 만끽한다. 아! 어김없이 봄이 돌아왔구나.
얼어붙었던 땅을 소리 없이 뚫고 솟아오른 새싹들과 앙상했던 나뭇가지에서 신념처럼 피어난 꽃과 잎사귀들로부터 생동감이 젖어온다.
봄이 소리 없이 안겨온다.
예수가 무덤에서 일어선 부활절이 4월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혹독한 겨울 시련으로부터 하느님을 믿고 봄의 기운을 받아 새 삶을 지향하라는 뜻깊은 가르침이 느껴진다.
봄은 화려하고 온유하지만 한편으로는 완강하고도 근엄한 도식을 권유한다.
미술사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어느 봄날 겸손을 절감했다. 그는 온갖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며 세계적인 평화로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완성하는데 꼬박 4년 9개월이 걸렸다. 작품을 완성한 어느 봄날 모처럼 성당 문밖으로 나와 눈부신 벌판을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사다리에 올라 누워서 자신의 천장화에 쓰인 사인(이름)을 지워버렸다.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창조주께서는 천산만야(千山萬野) 기화요초(琪花瑤草) 불세출의 봄 풍광을 만드셨는데 내가 그림 한 장 그렸다고 이름까지 써 놓다니 교만이다”라며 겸손을 보였다.
‘중용’의 도를 주장한 ‘장자’가 ‘호접몽(胡蝶夢)’을 체험한 것도 어느 봄날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스스로가 호랑나비가 되어 밤새도록 갖가지 꽃을 찾아 날아다녔다. 이 꿈을 꾸고 나서 그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이승(현실)인지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녔던 꿈속이 참 나인지 모를 일이라며 물화(物化) 절대 환상을 토로했다.
심오한 봄의 의미는 인간들에게 ‘인생 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 이라던가. 더 나아가 남가일몽(南柯一夢), 가벼운 숙제들을 만들어 내왔다.
봄은 또한 사랑의 계절이다. 열광으로 불타는 여름철만 계속된다든가, 온기 없이 폭풍 설한에 세상을 묻어버리는 겨울철보다 온유한 정감이 넘쳐흐르는 봄이 더 좋다. 봄은 자연스레 사랑을 밀어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성격 급하고 다정스럽지 못해 번번히 연애에 실패했던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도 이른 봄 알프스 산 자락에 피어나는 야생화 ‘아델라이데(Adelaide)'를 보고 떠나버린 첫사랑 소녀를 연모하여 곡(베토벤 아델라이데 op.46)을 남겼다. “봄날의 들판을 거닐면 아름다운 누리가 모두 아델라이데를 찬양한다”고 아델라이데라는 여성을 향한 정열이 넘친 찬가라 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선이 굵고 장엄하지만 아델라이데만큼은 매우 애잔하고 섬세한 멜로디로 이어진다. 봄을 타고 온 사랑은 우아하고 신비한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와 사랑과 평화를 권유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도 성스럽고 거룩하고 위대한 봄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일제 식민지 탄압에 저항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탄식했다. 한반도는 북한의 핵무기 협박 난동, 남한의 정치인들 분열, 혼란으로 저절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탄식이 나온다. 독재정치로 엄혹했던 시절 읊었던 ‘서울의 봄’을 또다시 부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현란한 이 봄, 기우(杞憂)가 앞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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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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