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다고 하면 나는 늘 부러웠다. 논밭 개울에 가서 개구리 잡고 가재 잡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지게지고 내려오면 꽁보리밥에 된장찌개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충남 논산 빈농 이었다. 소작농을 하셨던 할아버지는 6남매를 두셨는데 장남인 아버지와 아래 둘만 학교 뜰을 밟아보고 모두 무학이셨다. 일제 강점기 모두 힘들었던 시절이니 우리 집만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가난과 무식이 흉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인 지주 소작농을 하면서 한번은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여 그 일본인 지주와 다툰 적이 있었다. 강직한 할아버지는 유도4단, 가라데 4단, 검도 5단의 지주와 밤새도록 싸우셨는데 동네 사람들은 쯧쯧 아까운 저 강 씨 내일 아침에 송장 치우겠네 하면서 흩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 일찍이 그 집에 도착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강 씨가 위로 올라타고 앉아 그 일본인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일 날 것이라고 걱정하시던 할아버지는 아무 일없이 몇 달이 지나자 무슨 일인가 알아보셨다. 그런데 그 지주의 자식들이 아버지는 무술을 하신 사무라이인데 일자무식 농군에게 맞아죽은 것이 부끄러워 쉬쉬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제일 맡인 아버지를 겨우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시키셨다. 후에 아버지는 독학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시고 학교를 세우신 교육가로 성공하셨지만 우리 할아버지 집은 늘 못 배우고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교수로 발령 받아 우리는 대전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할아버지는 대전역 옆에서 고물상을 하셨다. 배움이 없으셨지만 배포가 크신 할아버지는 고물상을 크게 하셔서 나의 어린 시절은 늘 할아버지 집 뒤 창고가 놀이터였다. 그곳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각종 넝마, 빈 병, 옷, 자전거, 온갖 살림살이, 이부자리. 그리고 가장 값나가는 것은 놋그릇, 은수저 등 쇠붙이였다. 엿장수, 고물 장수가 고객이었다. 할아버지는 큰 주판알을 튕기시며 기초 부기를 스스로 터득하셔 어지간한 돈을 버시게 되었다. 서울에서 방학이 되어 서울역에서 대전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갈 때에는 어린 마음에 너무도 기뻤다. 천안역에서 잠시 쉴 때 먹는 각기 우동은 기가 막혔다. 각종 장사꾼들은 달걀 삶은 것, 데운 목장우유, 옥수수, 고구마, 사과, 오징어 등을 팔았다. 나는 6-7세 어린 나이에도 서울에서부터 대전까지 모든 역을 다 외웠다. 5시간 반 걸려 대전역에 도착하면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할아버지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는 반가워하시며 엿을 한 움큼 주셨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고물상 뒷마당 창고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나는 시골 논밭의 추억은 없지만 6.25 전쟁 후 가난한 도시 추억은 지금도 분명히 남아 있다. 바로 옆집은 젊은 여성들만 사는 집인데 그곳에 미군들, 젊은 청년들이 드나들었다. 우리는 그곳에 놀러가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겨울에는 중교라는 다리 밑에서 썰매타고 놀았다. 여름에는 가오리라는 곳에 가서 미꾸라지, 메기 잡아 어른들이 끓인 매운탕 먹던 생각이 난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 봉급을 우유와 치즈로 받아오신 아버지 밑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부유하게 자랐다. 미제 치즈 캔은 항상 곰팡이가 슬어있었는데 숟가락으로 걷어내고 푹 터서 밥할 때 푹 찌면 치즈 밥이 된다. 거기에 간장, 참기름 치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배곯지 않고 살았으니 이만하면 잘 산 것이었다. 대학 다닐 때도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다. ROTC를 꼭 가라는 아버지 분부로 신체검사 등 모든 것에 합격되었는데 마지막 신원조회에 문제가 있어 탈락하고 말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할아버지가 일본인을 격투 끝에 죽인 기록이 남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1920-30년대의 일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수 십년이 지난 1970년 말에 이게 무슨 엉뚱한 일인가? 어떻게 그 기록이 빨간 줄로 남아 대한민국 장교가 되는데 하자가 된단 말인가? 그 시절에는 그랬었다. 많은 분들이 시골에서 농사짓고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시골 경험만 추억이고 도시 경험은 추억 축에도 못 드나? 나에게는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소중하다. 미국 와서 목사가 된 지금도 나는 옛날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한다.
<강순구 목사 (성령의 비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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