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신 다음날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동태찌개다. 동태는 알다시피 얼린 명태를 말한다. 동해에서 잡혀 꽁꽁 언 상태로 서해 연안의 내 고향까지 먼 길을 온 그 생선은, 가공 방법이나 나이에 따라 생태, 동태, 황태, 먹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등으로도 불린다.
■비슷한 주산지, 가공법
와인 칼럼에 명태라니! 사실 필자에게는 ‘명태’ 하면 떠오르는 와인이 있다. 주산지가 반도 북동부에 위치한다는 점, 가공법에 따라 스타일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지만 재료는 동일하다는 점, 일부는 건조 가공된다는 점까지, 서로 다른 둘이 여러모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반도 북동부에는 베네토(Veneto)주가 있다. 바로 이 지역의 베로나 북쪽에 넓게 자리한 ‘발폴리첼라’라는 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이탈리아는 전 국토에서 와인이 생산될 정도로 포도 농사가 잘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탈리아를 가리켜 오에노트리아(Oenotria) 즉 와인의 땅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도 베네토주는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한다. 발폴리첼라에서 생산되는 와인 외에도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Prosecco)와 화이트 와인 소아베(Soave)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이들 와인 대부분은 우리나라에도 수입되는 터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발폴리첼라에서 생산되는 네 가지 스타일의 레드 와인이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아마로네, 레치오토, 리파소, 발폴리첼라가 그것인데 정식 명칭이 꽤 긴 탓에 이처럼 줄여서 부른다.
발폴리첼라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그런데 재료가 되는 포도 품종뿐만 아니라 사용 비율까지도 규정이 동일하다. 마치 명태 가공품처럼 말이다. 이들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는 모두 토착 품종이라 생소하다. 코르비나(Corvina Veronese)와 코르비노네(Corvinone)를 합쳐 45~95%까지(코르비노네는 코르비나의 50%까지만 허용), 론디넬라(Rondinella)는 5~30%까지, 이외에도 몰리나라(Molinara), 오셀레타(Oseleta)와 같은 기타 품종을 25%까지 블렌딩해 와인을 빚어야 한다. 단 최근의 트렌드는 몰리나라의 비율을 줄이거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로부터 발폴리첼라 마을에서는 포도를 수확한 뒤 곧바로 와인을 만들지는 않았다. 나무 받침대 위에 포도를 놓고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바람이 잘 통하는 실내에서 3~4개월 동안 자연 건조한 다음 와인을 빚었다. 오랫동안 포도를 건조하면 당도가 높아지고 풍미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아파시멘토(appassimento)’라 한다.
조금 억지스러울지는 몰라도, 가만 보면 황태도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겨우내 건조되지 않는가. 황태는 당도가 높아지지 않지만, 풍미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
■와인 애호가를 사로잡은 ‘레치오토 아마로’
건조가 끝나면 당분 등 여러 성분이 응축된 포도를 발효시킨다. 그러다가 당분이 남은 상태에서 발효를 중단시키면 달콤하고 풍미 진한 와인이 만들어진다. 보통 리터당 50g 이상의 당분을 와인에 남기는데, 이런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레치오토’라 한다. 정식 명칭은 레치오토 델라 발폴리첼라(Recioto della Valpolicella) DOCG이다. 발폴리첼라 마을에서 생산한 레치오토 와인이라는 뜻이다.
레치오토는 진한 루비색을 띤다. 체리와 자두에 말린 과일향을 품은 데다 초콜릿향과 허브향이 어우러져 달콤한 내음과 맛이 일품이다. 주로 디저트와 함께 서빙되지만 와인 자체로도 손색이 없다. 레치오토는 드물지만 스푸만테(스파클링 와인)로도 만들어진다.
레치오토 와인을 만들다 생겨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936년 발폴리첼라의 협동조합 와이너리에서 생긴 일이다. 어느 날 이곳에서 일하던 아델리노 루케제(Adelino Lucchese)가 와인을 빚다가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 레치오토를 만들던 오크통 하나를 방치해 전혀 다른 와인이 빚어졌다. 중간에 발효를 중지시켜야 했는데 그만 때를 놓친 것이다. 혹시나 하고 와인을 맛보았는데 당분이 거의 다 발효되어 드라이하고 씁쓸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지만, 맛이야말로 ‘생물’이 아니던가. 속담이 무색하게 드라이하고 씁쓸한 와인 맛이 나쁘지 않았으니 달콤한 레치오토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것은 보통 쓴 와인이 아니다. 위대한 쓴 와인이다(questo vino non amaro, un Amarone).” 뜻밖의 와인 맛에 안도한 그가 남긴 말이라고 전해진다.
사람들도 곧 이 맛에 매료되었다. 1939년 마침내 달콤한 레치오토에 ‘쓰다’라는 뜻의 아마로(amaro)를 붙여 ‘레치오토 아마로(Recioto amaro)’라는 와인이 출시됐다.
인기는 곧 유행이 됐다. 시간이 흘러 볼라 와이너리가 처음으로 ‘아마로네’라는 이름을 단 1952년산 와인(Amarone Bolla Riserva del Nonno)을 출시했다. 뒤이어 베르타니 와이너리도 레이블에 아마로네를 명시한 1959년산 와인(Reciotto Secco Amarone)을 내놓았다.
아마로네의 정식 명칭은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Amarone della Valpolicella) DOCG’로 발폴리첼라 마을에서 생산한 아마로네라는 뜻이다.
사실 요즘 입맛으로 보자면 아마로네는 이름과 달리 그리 쓰지는 않다. 원재료를 건조해 당도를 한껏 끌어올린 포도이니 맛이 진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다(14~16도). 건조한 포도 중 일부는 귀부균(Botrytis Cinerea)의 영향을 받아 점성과 단맛이 있는 글리세린이 생성된 탓에 질감이 둥글고 부드럽다. 숙성 기간도 최소 24개월로 길다(리제르바는 최소 4년). 검은 체리, 자두, 말린 과일, 아몬드, 커피, 다크 초콜릿, 허브, 타르, 감초, 가죽 풍미가 느껴진다.
■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와인의 맛
와인 애호가들은 ‘아마로네’ 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틋한 사랑을 떠올린다. 두 사람의 이야기 배경이 아마로네를 생산하는 발폴리첼라 인근의 베로나인 데다가 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와인 맛이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베로나는 세계적 인물과도 관련이 있다. 바로 ‘신곡’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다. 단테는 우리에게 작가로 알려졌지만 피렌체 공화국 태생의 정치가이기도 했다. 모름지기 ‘생물’의 원조는 ‘정치’ 아닌가. 정쟁에 휘말린 그는 고향에서 추방당해 망명 생활을 전전하다 1312~1318년까지 베로나에서 노년을 보내고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단테는 베로나에 머무르는 동안 이곳의 와인에 두어 가지 족적을 남겼다. 서두에 잠깐 언급한 화이트 와인 소아베(Soave). ‘부드럽다’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을 붙인 이가 바로 단테라고 한다. 또한 그의 아들 피에트로 알리기에리(Pietro Alighieri)는 이곳에 포도밭을 구입했는데, 그 후손들이 21대에 걸쳐 와인을 만들고 있다. 마시(Masi) 와이너리의 세레고 알리기에리(Serego Alighieri)라는 브랜드가 그것이다.
■레치오토·아마로네와 먹태·황태
하여튼 레치오토와 아마로네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포도를 건조하여 당분과 풍미를 끌어올리는 아파시멘토 방식으로 빚어진다. 필자가 두 와인을 공부할 때 먹태와 황태를 떠올린 건 이 때문이다. 아마도 와인을 명태에 빗대어 기억한 사람은 필자밖에 없을 듯하다.
먹태는 겉은 검게 마르고 안은 덜 건조되어 맛이 좀 더 부드러운데 겉이 검다 하여 먹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중간에 발효를 중지해 부드럽고도 달콤한 맛을 가진 레치오토와 먹태가 닮지 않았는가.
한편 황태는 완전히 건조되어 맛이 일품인 데다 명태 가공품 중 최고로 치니, 아마로네와 닮았다. 건조한 포도를 완전히 발효해 만들어 진하고 깊은 풍미를 품은 발폴리첼라 최고의 와인이니 말이다. 아마로네는 이탈리아 4대 명품 와인으로도 꼽힌다. 4대 명품 와인에는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그리고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Amarone della Valpolicella)가 있다.
아마로네와 레치오토는 포도를 자연 건조해서 만든 와인이라 했다. 포도를 건조하면 수분이 30~40% 정도 빠져나가 당도가 올라가지만 와인 양은 그만큼 줄어든다. 생산원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특히 아마로네는 최상급 포도를 선별해 사용하다 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와인의 세계에는 언제나 차선책이 있다.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도 아마로네를 즐길 수 있다. 흔히 ‘빈자를 위한 아마로네’나 ‘베이비 아마로네’라 불리는 ‘리파소’다. 정식 명칭은 발폴리첼라 리파소(Valpolicella Ripasso) DOC이다.
발폴리첼라에서는 건조한 포도로만 와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건조하지 않은 생포도로 발효해서 와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일반 와인에 마을 이름을 붙여 ‘발폴리첼라’라 부른다. 정식 이름은 발폴리첼라(Valpolicella) DOC로 스타일로 보자면 드라이한 와인이다.
리파소는 re-passed, 즉 다시 통과했다는 뜻으로, 발효를 마쳤거나 발효 중인 발폴리첼라에 아마로네나 레치오토를 만들고 난 포도 껍질 등 잔여물을 첨가해 발효 시켜 만든다. 껍질에는 당분뿐만 아니라 여러 성분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볍고 신맛이 도는 발폴리첼라에 아마로네의 색과 타닌과 풍미가 더해져 그야말로 맛도 좋으면서 가격도 합리적이다.
정리하면, 발폴리첼라에서는 같은 재료로 4가지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한다. 명태 가공품에 빗대면 생포도로 만드는 일반 와인 발폴리첼라는 생태, 레치오토와 아마로네는 포도를 말려서 만드니 먹태와 황태다. 그러면 리파소는 반건조한 코다리쯤 될까.
문득 와인과 명태를 연결해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탐식의 연옥에 갇혀도 좋으니, 누가 창문을 열어다오.’
<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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