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식사모임에서 한국의 부동산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원로 금융인이 헨리 조지라는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이름을 꺼냈다. 그는 “토지소유에 따른 불로소득은 세금의 형식으로 환수해 공공에 돌려줘야 한다”는 헨리 조지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일부 내용에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금융업계에 평생을 몸담아온 인사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발언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 재벌 집에서 입주 과외교사를 하며 보고 느꼈던 경험들이 불평등과 불공정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토지공개념’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는 헨리 조지는 지난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가 사회적인 이슈가 됐을 때 한국 언론에 많이 오르내렸던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비주류 경제학자이다. 학력은 중학교 중퇴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가 19세기 말에 쓴 책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 서적의 하나로 꼽힌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토로했으며 저명한 사상가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헨리 조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명의 사상가 중 한명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가 진보하려면 ‘평등한 상태의 협동적 결합’에서 나오는 ‘정신적인 힘’(mental power)이 원동력이 돼야 하며 그런 힘은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헨리 조지 주장의 핵심이다. 특히 ‘경제적 평등’은 ‘정치적 평등’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다고 본 부분에서 그의 혜안이 번득인다. 조지 헨리는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상태에서는 정치적 평등이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에 계속 표를 몰아주는 ‘계급배반’ 투표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부의 분배가 공정한 상태에서는 정부가 민주적일수록 좋지만 불평등한 상태에서는 정부가 민주적일수록 더욱 나쁘다”는 것이다. 마치 진보를 표방하고도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초래하고 부의 불균형 해소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질책처럼 들린다.
갈수록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현상은 민주주의의 퇴보이다. 외형적으로는 정치적 평등을 획득한 듯 보여도 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실패하면서 정치적으로 날로 불평등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금권을 쥔 기득권층의 지배는 한층 더 공고해지고 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것은 돈에 지배되는 언론들이다. 민주주의 위기론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없이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정치학자는 스탠퍼드대의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소득과 부의 분배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불평등과 불공정에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20세기 초 미국이 불평등에 따른 혼돈과 위기 속에서 새로운 규범을 세워나가는 데 큰 기여를 한 위대한 연방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갖거나 막대한 부가 몇 사람의 손에 집중되도록 할 수 있지만 이를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한 국가와 사회가 역동성을 유지한 채 민주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불평등이 최소화돼야 한다. 가장 성공적인 스포츠 리그들을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자원의 배분을 통해 불평등을 줄이려 노력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지속가능성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차기 정권이 떠안아야 할 가장 중대하고도 시급한 국정과제는 불평등의 해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선택을 해야 하는 유권자들의 최우선 고려 사항 역시 이것이 돼야 한다. 여당 후보는 불평등 해소를 핵심 공약으로 내놓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현 정부의 지난 5년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쉬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야당 후보는 온갖 거칠고 험한 표현들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외치면서 정권교체를 주장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깊은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자유 등 한국의 민주화 지수는 이전 정권들에 비해 크게 향상됐으며 정치적 평등 역시 제도적으로 확고하게 보장돼있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이런 정치적 평등은 갈수록 무력화되고 소수세력의 기득권을 합리화 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혼돈의 시기를 헤쳐 나가며 앞서가는 시대정신을 보여준 선각자들의 통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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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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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과연 최선인가 하는 회의적 질문과 그래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답을 반복하게 되는 현실을 잘 짚어주신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