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었던 책 중에 ‘나(I) 화법’(I-message, I-statement)에 관한 책이 있었다. ‘1인칭 화법’이라고도 한다. 대화를 할 때, 그리고 말싸움을 할 때에도, 1인칭인 ‘나(영어의 I)’를 주어로 말하는 방법이다.
영어는 문장 안에서 반드시 주어(I, you, he, she, it, we, they)를 적는다. 그러나 우리말은 문장에서 주어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말 짧은 대화 하나를 생각해보자. “어디 가냐?” “학교.” 이 두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이렇게 우리말은 주어를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된다. 겉으로는 주어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주어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라면 “Where are you going?” “I’m going to school.”이라고 말할 것이고 여기에는 ‘너(you)’라는 주어와 ‘나(I)’라는 주어가 드러나 있다.
누군가에게 언짢은 말을 들었을 때 반응하는 두 개의 문장을 생각해보자. 나(I) 화법으로 말하는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나빠.”라는 문장과 너(you) 화법으로 말하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해?”라는 문장이다. 이 두 문장은 그게 그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해?”라고 말하면 문장 중에서 생략되었지만 주어는 너(you)이다. ‘너’가 말을 기분 나쁘게 했고, ‘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내 기분이 나빠졌다는 뜻이다. 문제가 상대방에게 있다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나빠.”라는 말은 문장 안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주어는 나(I)이다. 그런 말을 들은 ‘나’ 그리고 기분이 나빠진 ‘나’ 이야기만 있다. 상대방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내 얘기’만 했기 때문에 부드러워졌다.
이런 표현은 영어에서 더욱 명확해 진다. 영어는 문장 첫머리에 주어가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첫 단어가 you가 아닌 I로 시작하면 ‘나(I) 화법’이 된다. 위키피디아에서 문장 두 개를 가져온다.
먼저 I(나)로 시작하는 문장을 본다. “I had to read that section of your paper three times before I understand it.” (나는 당신 글의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읽어야 했습니다.) 같은 글을 세 번이나 읽어야 했던 ‘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물론 ‘당신 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글 쓰는 법을 좀 더 연마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말이지만 상대방에게 직접 지적하지는 않는다. ‘나’에 대한 얘기만 한다.
다음은 you(너)로 시작하는 문장이다. “You need to learn how to word a paper more clearly.” (당신은 글을 명료하게 쓰는 법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는 ‘너’는 글 쓰는 법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 이유는 ‘너’의 글이 명료하지 않다는 즉 ‘너’의 형편없는 문장 구사력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두 문장을 비교해 보면, 결국 내용은 상대방의 작문실력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지만, 나(I)로 시작하는 문장이 너(you)로 시작하는 문장보다 좀 더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의 수용 가능성도 더 높다.
대부분의 주어가 문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영어와 달리 우리말은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I) 화법’을 쓰려면 조금 불편하기는 하다. 먼저 머릿속에서 문장을 구성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어에 비해서 조금 복잡하다. 우리말과 영어 사이에는 주어 사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우리말은 수동태의 사용이 활발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 된다. 오래전에 읽었던 그 책도 영어로 쓴 것을 번역한 것이었다.
주어를 말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는 우리말에서 ‘나(I) 화법’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면에서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 상대방이 약속시간에 늦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좀 늦으셨네요...”라고 말한다면 ‘너(you) 화법’인 셈이다. 너(you)라는 주어가 생략된 것이다. 약속시간에 늦은 상대방에 관한 얘기이고 약속시간에 늦은 ‘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말은 공격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사람은 늦게 된 온갖 이유가 머릿속에 쫙 펼쳐진다. 미안함에 앞서서 방어기제가 먼저 작동된다.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I) 화법’으로 말하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가 된다. 약속시간에 늦은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 관한 얘기만 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없다. 그러므로 상대방도 늦은 것에 대한 사과를 하기에도 좋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좀 늦으셨네요…”라고 ‘너(you) 화법’으로 말하는 것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나(I) 화법’으로 말하는 것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I) 화법’으로 말하면 상대방에게 돌리는 책임의 무게가 덜해진다.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면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영어의 “What’s wrong with you?”라는 말을 싫어한다. 뭔가 잘못(wrong)된 것이 있는데 그 잘못의 원인이 ‘너에게 있다(with you)’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공격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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