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때 피 묻은 태극기, 사무실에 걸어놓고…
▶ 장진호전투서 13군데 부상 “1995년 한국 방문후 깜짝 한국전 참전 자랑스러워”
애난데일 사무실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부동산 비즈니스를 하는 루디 미킨스 한국전 참전용사가 16일 자신이 참전한 장진호 전투가 소개된 책자를 내보이고 있다.
“저는 한국을 정말 사랑합니다. 당시 어린 소년이 쌀 포대자루에 그려 저에게 준 태극기는 전쟁 중 제 가슴속에 있었고 지금도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에서 부동산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는 루디 미킨스 씨(영어명 Rudy Meekins, 91)는 자신의 사무실에 쌀자루에 그린 태극기를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비즈니스를 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 1사단 소속으로 월미도에 상륙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그해 9월28일 서울 수복 후 평양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26일부터 12월13일)에서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과 교전을 했고 12월6일 두 다리와 오른쪽 팔 등 13군데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당시 부상으로 상이용사에게 주는 무공훈장(Medal of Hearts)을 4개나 받았다고 한다.
“쌀자루에 그려진 이 태극기는 제가 서울에서 만난 10세에서 12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제 소지품과 맞바꾼 것인데 장진호 전투 중 부상을 당할 때 제가 군복 안에 갖고 있어서 당시 흘린 피가 태극기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미킨스 씨는 장진호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 바로 전날만 해도 교전 중 죽은 아군의 시체나 부상병들을 트럭에 실었는데 자신이 다음날 그런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1950년 겨울 혹한의 날씨 속에 치러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명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미군 1해병사단 및 육군 7사단의 3개 대대 등 1만8,000여명이 백병전을 벌였고 미군 사상자가 1만2,000여명이나 발생했다. 중공군 사상자도 4만5,000명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옷에 부착된 장진호 전투의 상징인 ‘고토리 별’ 핀을 통해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를 소개하며 자신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장진호 전투가 소개된 책자 ‘Frozen Chosin(얼어붙은 장진호)’을 내보였다.
“당시 해병대는 동쪽 해변을 따라, 육군은 서쪽으로 진군했는데 정말 추웠고 동상이 문제였습니다. 저도 당시 동상을 입었습니다. 합참의장이었던 조지프 던포드의 부친도 이 전투에 함께 했습니다. 버지니아 콴티코 소재 미 해병대 박물관에 들어선 장진호 전투기념비는 ‘고토리의 별’로 상징됩니다. 포위 당했던 미군이 철군을 앞둔 밤인 12월7일 갑자기 눈보라가 개이고 장진호 인근인 고토리에 별이 떠올랐는데 이것이 장진호 전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10만명의 피난민을 남으로 내려보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흥남 철수 작전(1950년 12월15일-24일)을 가능케 했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돌파한 뒤 흥남에 집결했고 피난민을 수송선에 태워 남으로 보냈다.
노스캐롤라이나 아우터뱅크 소재 낵스 헤드(Nags Head) 출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에 미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4개월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일본과 하와이, 캘리포니아, 텍사스, 메릴랜드를 거쳐 버지니아 노폭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이송됐다.
“지금도 기억이 또렷해요. 1951년 1월8일 노폭 해군병원으로 이송돼 1952년 11월30일 퇴원하고 전역할 때까지 거의 2년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하사(Staff Sergeant)로 제대했습니다.”
그는 전역한 후 같은 해 12월13일에 결혼을 하고 버지니아 소재 스트레이어 대학(Strayer University)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다. 이후 1958년에 부동산 에이전트가 됐고 다음해에는 브로커가 됐다. 당시에는 에이전트로 1년만 근무해도 브로커가 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바로 버지니아로 이주했으니까 이 지역에서 산지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부동산 비즈니스를 한지는 63년이 넘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태권도의 원로인 이준구 사범 집도 제가 주선했습니다.”
미킨스 씨는 1995년 참전용사 방한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당시 5일 동안 서울의 5성급 호텔에서 머물며 변화한 한국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끊겨진 한강 다리는 다시 세워졌고 마치 제 자신이 뉴욕에 온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로 잿더미가 된 한국을 이렇게 발전시킨 것을 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남북통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남한과 북한이 완전히 다른 체제로 70년 이상 운영됐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독재자 밑에서 생활해온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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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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