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들어 오랫만에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감상하게 되었다. 오페라라고 해봤자 ‘로엔그린’을 비롯 ‘링(사이클)’에 나오는 발췌곡들이 전부였는데 아무튼 내친 김에 바그너에 대해 써보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마무리 하고 나니 도대체 무슨 글을 썼는지 스스로에게 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 바그너(1813-1883)는 어렵고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워낙 방대하기도 하지만 논란이 많은 작곡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바그너 음악을 (아예) 듣지 않는 사람들은 많아도 바그너 음악을 적당히 듣는 사람들은 없다. 즉 바그너의 음악은 그만큼 싫거나 좋거나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젊은 시절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고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나의 경우, 니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어딘가 최면에 걸린 느낌같았다고나 할까, 조금 지루한 면도 있었지만 가슴 속 깊이 벅차오르는 구도적 해방감… 이런 것들이 길고 지루한(신화) 이야기들과 뒤죽박죽이 되어 그야말로 와신상담, 쓰디 쓴 쓸개를 맛본 뒤의 통쾌한 복수와 같은 감흥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었다. 마치 음악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수행, 긴 여행 뒤에 맛 보는 어떤 해방감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듣고 감동하여 ‘노이슈반슈타인’이라는 성을 지은 바이에른 국왕의 이야기도 있지만 바그너가 탄생시킨 신화의 예술은 어마어마한 추종자들을 낳았는데, 히틀러나 바이에른 국왕(루드비히 2세) 등은 새삼 지루한 설명일 뿐이고 말러, 미시마 유키오, 스티브 호킹, 토마스 만, 칸진스키, 쇼송, 버나드 쇼 등등 음악, 미술, 문학, 과학, 정치… 등등 모든 분야에 끝이 없다. 니체의 경우 ‘파르지팔’을 보고 ‘바그너 신도’에서 ‘반도’로 돌아섰는데 나의 경우 오히려 ‘파르지팔’을 보고 바그너를 더 좋아하게 됐으니 어쩌면 나 역시도 바그너에 빠진 ‘바그너 신도’ 중의 한 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을 조금 좋아한다고 해서 누구나 ‘바그너 매니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바그너 매니아’(혹은 바그너 신도)가 될 수 없는 것은 바그너의 음악 자체보다는 바그너 자신이 쳐 놓은 ‘바그너 주의’라는 덫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배 수호자들의 이야기, 중세의 기사… 절대 믿음에 헌신된 영혼들… 성금요일의 기적… 예술지상주의, 음악적 구도론… 이런 것들은 너무 거창하면서도 종교적이며 사람의 영혼을 피곤하게 만드는데 바그너는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인내의 쓴 잔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 한갖 예술따위의 감상을 위해 와신상담, 쓸개를 씹는 것 같은 인내를 감내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
세상에는 (거의) 유일하게 바그너만이 각 나라마다 바그너의 이름을 딴 ‘바그너 협회’라는 것이 존재한다. ‘베토벤 협회’같은 것이 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그너 협회 회원들은 바그너 음악에 열광하며 매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같은 바그너 축제에 참가하고 회원비를 모아 바그너 음악을 위한 음악가들을 키우는데 적극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바그너 협회 회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얼마만큼의 바그너에 대한 이해, 자격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만 아무튼 바그너야말로 단순히 음악가라는 말로는 부족한, 거의 절대 추종자를 거느린 유일한 작곡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그너를 싫어하는 측의 입장은 그의 사상이 너무 선과 악 등, 이분적인 논리로 편을 가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선한 자는 성배 수호자, 순결한 영혼과 믿음을 가진 자, 악한 자는 클링조르같은 성배 수호를 방해하는 마법사같은 존재들이다.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링 사이클)’에서도 물질(황금반지)과 영혼에 대한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 바 있는데 문제는 선한 존재가 독일 게르만 족이요 악한 존재가 물질적인 유태인들이라는 괴변으로 변질된데 있었다. 즉 영지주의랄까, 바그너의 영혼 숭배, 물질 배척 의식에서 반 유대주의가 탄생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나치처럼 인종주의, 파벌주의를 낳는데 일조하게 됐다. 그러나 바그너의 근본 사상은 본래 반 유대주의나 인종주의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배 수호자(파르지팔), 저주받은 화란인, 백조의 기사(로엔그린), 영웅 손에 의해서만 꺼지지 않은 불 속에서 부활할 수 있는 잠자는 숲 속의 여인(니벨룽의 반지)… 발할성의 거인들… 신들의 황혼… 바그너는 그저 신화를 통해 영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아무튼 바그너의 초극적 세계관은 장엄하고도 강렬한 선율로 유럽의 많은 지성들을 최면에 취하게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분량이나 수준때문만은 아니었고 바그너의 삶 자체가 예술에 헌신된, 예술의 분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그너는 단순히 예술지상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믿었던(숭배) 듯 하다. ‘파르지팔’ 등에서 아무도 박수치지 말 것을 종용한 뒤 오직 자신에게만 스스로 박수를 치며 자화자찬, 도취에 빠져있는 모습은 단순히 하나의 예술가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교조적이었고 마치 교주와 같은 모습이었다. 왜 사느냐하는 것이 종교의 문제라면 바그너의 예술은 인간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매 순간, 어떻게 감동으로 구도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었든, 넌센스이었든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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