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공터에 어둠이 한 겹씩 내려앉고 있다. 어디선가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참새 한 마리가 그 빈 풍경 속으로 내려앉는다. 하루 종일 움직임이 드문 시야로 찾아든 작은 손님이 반가워 한 마리 새의 경쾌한 동선을 시선으로 쫒는다. 먹거리를 찾느라 두 다리를 모아 총총총, 뛰어 다니는 모습이 짧은 음표처럼 가볍다.
가게 앞 공터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땅을 할애하여 직원이나 손님들이 쉴 곳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늘 사람들이 머물던 공간인데 지금은 빈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겨울 팬지 몇 포기가 풀죽은 채 피어 있을 뿐이다. 두말할 나위없이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의 공터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새벽부터 헬스장으로 운동하러 가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아침신문과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건물 내의 직원들이 따로 또 같이 점심을 먹으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곳도 그곳이었다. 나도 가끔은 벤치에 앉아 햇볕 쪼이기를 했다. 공터가 가장 북적이는 건 햇빛이 수직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는 정오 경이었다. 근처 하이스쿨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면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떼 지어 나와 점심을 먹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산 피자나 햄버거, 샌드위치 같은 걸 먹으며 소란스럽던 학생들이 떠나고 나면 공터엔 음식물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 어수선한 자리로 시간차를 둘 것도 없이 날아드는 건 까마귀들이었다. 등이 반질거리는 까마귀들이 잔반처리를 하는 동안 때로는 성질 급한 참새들이 차례를 못 참고 끼어들기도 했다. 까마귀들이 용서할 리 없다. 작은 침입자들을 향해 까마귀가 한 발로 으름장을 놓으면 눈치 빠른 참새들은 탁구공처럼 날아올랐다. 배를 불린 까마귀들이 기우뚱한 날갯짓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공터는 참새들의 차지가 되었다.
참새들에게도 서열은 있다. 덩치가 조금 크고 강한 놈들은 피자 조각처럼 큼지막한 먹이를 차지하고 약한 놈들은 구석에서 부스러기나 쪼아 먹는다. 참새들이 퇴장할 때쯤이 되어서야 건물 주변을 청소하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빗자루질을 아랑곳하지 않고 비껴 다니며 먹이에 집착하는 참새들은 그날 지각한 놈들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되풀이되는 공터의 일상이었다.
부산했던 풍경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겨울로 접어들자 햇빛마저 허름해졌고 공터에는 가끔 찾아오는 노숙자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는 것이 전부이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라떼가 맛있던 커피전문점과 테일러샾도 간판을 내렸다. 다른 가게들도 문은 열려 있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새들도 좀처럼 날아들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로 병원균들이 따뜻한 온도에 적응하게 되면서 우리의 체온인 37도의 장벽을 넘어 사람에게 기생하기 쉬워졌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를 자처한 주범이 사람들이고 결국 자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코로나라는 병원균에 잠식 당한 세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나의 일상도 마비되었다. 마음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요동을 친다. 반평생 가까이 몰입했던 사업체들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상, 내일이라는 시간을 가늠하거나 내다볼 수 없게 된 세상이 해를 넘겼다.
이런 세상을 살아오며 변한 게 있다면 터무니없이 멀리 세워두던 나의 이정표를 오늘이라는 하루의 끝으로 옮겨온 것이다. 생각도, 번민도, 계획도 딱 하루치씩 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에 내일이란 시간을 덧대지 않고 살아보니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었다. 가끔은 참새처럼, 풀씨를 찾아 하루를 유랑하는 그 새처럼 나도 남은 시간들은 그렇게 가볍고 경쾌하게 살 수 있기를 소원해 보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서 변한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새소리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흥미로웠다. 도시가 봉쇄되고, 음의 풍경에서 인간이 떠나자 새소리가 한 톤 낮아지고 부드러워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인간이 만든 소음 때문에 수컷 새들이 높은 음역대로 짝을 찾는 노래를 해야 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새들의 수명을 짧게 만들었다고 한다.
본디의 음역을 찾은 새들이 낮고 섬세한 소리로 노래하게 되었다니 사람은 설 자리를 몰라 헤메고 자연은 제자리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한눈 파는 사이 날아가 버린 아까 그 참새는 쉽사리 얻을 수 있던 먹이가 생각나 찾아왔을 것이다. 추위를 견디느라 털을 잔뜩 부풀리고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던 그 참새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쯤은 어딘가에서 배를 채우고 하룻저녁 기숙할 나뭇가지를 찾았을 것이다.
코로나에 점령 당한 세상에도 봄은 올 것이다. 한 음 낮은 새들의 노래는 먼 숲으로 날아가 서로를 깨울 것이고 나무들은 언 몸을 열어 초록을 내놓을 것이다. 순서를 어기지 않고 돌아올 계절 앞에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멀어져가는 오후와 다가오는 저녁 사이의 시간, 겨울 저녁 다섯 시가 되면 지구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한 꺼풀씩 내려오던 어둠이 풍경 전체를 삼켜버리는 건 눈 깜짝할 사이다. 창밖의 풍경은 지워지고 심심해진 유리창이 거꾸로 가게 안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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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미 / 수필가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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