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은 예로부터 신년이면 그해의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있다. 정조 이후인 조선 말기부터 자리 잡은 세시풍속이다. 이전에는 한 해의 농사나 가정의 화목을 점치곤 하였는데 조선 말기에 들어서며 부패한 관료들의 핍박에서 비롯된 결핍으로 민간에서는 조금 더 세분화하여 개인의 운세를 점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토정 이지함이 지은 토정비결은 개인의 사주 중 연, 월, 일, 세 가지로 육십갑자를 이용하여 일 년 열두 달의 신수를 알아보는 것이다. 정초가 되면 다가오는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하기에 오늘날까지 재미 삼아 이어져 오는 풍습이다.
무릇 신년에만 한 해의 운수를 점친 것은 아니다. 육십갑자를 글로 풀어 설명해주는 것 이외에도 한반도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라의 큰일을 앞두고 앞날에 대한 예언을 점치고 노래로 지어 부르기도 했다.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좋고 궂은일을 예언하는 노래를 참요라고 하는데 참요는 민요의 일종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성행했다. 참요는 사회혼란기에 정치적 징후나 전쟁, 왕권의 교체 등과 같은 조짐을 암시하는 노래가 많았는데 주로 특정한 목적을 지닌 일부의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다. 조선 후기에는 부패한 양반과 관료들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 양반의 탐욕과 관료의 악랄한 수법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노래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풍부한 감정과 아름다운 정서를 지닌 한민족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승하기보다 이야기에 가락을 얹어 노래로써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일을 할 때는 노동요를 부르며 고된 일을 함께 힘을 내도록 노래했고 어른은 아이에게 전하는 구전동화를 노래로 들려주었으며 아리랑과 같은 민요를 부르며 환난 극복을 위해 다 같이 화합하여 노래하고 또 고인의 마지막 길에도 구슬픈 상여가를 부르는 등 살펴보면 민간의 크고 작은 일에는 어김없이 노래가 등장한다.
한국 민요는 언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노래를 만든 작곡가나 작사가도 없으며 당시의 사상과 생활, 그리고 감정을 담은 사설에 지역적 특색을 지닌 가락을 담아 노래한다. 작곡가나 작사가가 없이 민중들에 의해 오랜 기간 다듬어지고 노래 부른 만큼 그 발생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참요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백제 의자왕 20년, 귀신이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를 홀연히 외치고 사라져 그 자리를 파보았더니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 신라는 초승달이라는 참요의 구절이 있었다. 왕이 무당을 시켜 뜻을 풀이했는데 백제가 둥근달이라는 것은 달이 찼으니 기운다는 것이며 초승달인 신라는 이제 가득 찰 일만 남았으니 쇠락하는 백제를 예언한 것이다.
조선 건국 시에 이성계의 측근들은 ‘서경성 밖에 불빛이요, 안주성 밖에 연기로다. 그사이 오락가락 이 원수야 우리 백성 구제하소’라는 노래를 지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여론을 담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 17세기 인조 시대에 유행한 연주문요는 ‘성났다 변났다, 연주문을 열어라, 호박국을 끓여라, 너 먹자고 끓였니, 나 먹자고 끓였지’라는 가사로 병자호란 당시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의병투쟁을 무시한 채 적에게 굴복해 굴욕적인 화의를 맺은 조선 왕실과 관료를 규탄한 노래이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왕비인 민비를 내쫓고 후궁인 장희빈을 새로 왕비로 맞아들인 숙종을 풍자한 노래로 미나리요를
부르기도 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가사의 이 참요는 사철 푸른 미나리는 민비에, 한철인 장다리는 장희빈에 빗댄 것으로 결국에는 민비가 장희빈을 이길 것이라는 정치적인 내용을 담는다. 동학혁명 때는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혁명이 실패할 것을 예언한 참요를 지어 불렀다. 당시 크게 유행한 녹두새요로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 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두류박 딱딱 우여’의 가사로 녹두 새가 별명인 전봉준에게 빗대어 참요를 지었다.
이처럼 참요는 선전, 풍자, 예언 등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이나 정치적인 행태를 노래에 담는다. 민간 가요의 하나로 오래도록 성행한 참요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생활을 반영했는데 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민중은 고달픈 생활로 인해 양반에 대한 조소와 증오, 투쟁 등 정치적인 요소를 많이 담게 되었다. 예언적이고 풍자적인 요소 안에 민중의 희망을 담았으며 상황이 해결되면 당시에 부르던 참요는 사라졌다.
민요는 참요와 같이 전문 소리꾼이 아닌 일반인들이 부른 토속민요와 사당패와 같은 전문 소리꾼과 기녀들에 의해 세련되게 다듬어진 창민요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후에 이 창민요는 각 지역을 다니는 사당패들에 의하여 지방의 토속민요와 만나 대중의 통속민요로 자리 잡아 전승되고 발전한다. 아름다운 정서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한민족은 대를 이어 자신들의 생활과 사상, 그리고 감정을 담은 훌륭한 민요를 많이 창작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대중 속에서 널리 불리고 다듬어진 민요는 시대별, 지역별로 예술적으로 승화했다. 우리 고유의 민족적 특징과 정서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