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 마냐나(Hasta manana).”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원뜻은 ‘내일까지’인데 ‘내일 봅시다’ 또는 ‘일은 내일 하면 어떤가’ 등의 뜻으로 쓰인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한 지인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골치 아픈 일 얘기가 나오면 ‘아스타 마냐나’라고 말하면서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우리의 격언과 너무 대비된다. 말 한마디에 담긴 국민 의식과 지도자의 국정 철학이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 10대 부국이었다. 1913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중남미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후안 페론 대통령 부부가 주도한 페로니즘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페론은 노동자·빈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외채 동원과 화폐 발행을 통해 임금 인상과 무상 복지 등 포퓰리즘 정책을 밀어붙였다. 외려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가 초래한 경제 위기는 서민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었다.
그 뒤 아르헨티나는 군부 정권과 페론주의·반(反)페론주의 민간 정권이 회전문식으로 돌아가며 정권을 잡았으나 페로니즘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9차례 국가 부도를 선언하고, 20차례 넘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2004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방문을 취재하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았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웅장한 유럽식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대부분 시설은 낡고 녹슬었다. 당시 가로수 ‘자카란다’의 빛바랜 보라색 꽃을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쇠락 배경에 궁금증을 갖게 됐다.
한국 대선도 포퓰리즘 노름판이나 다름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승부수로 꺼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집권 직후 자영업자 손실보상 50조 원’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 후보는 국민들 반응이 시큰둥한 전 국민 재난지원금 공약을 일단 접은 뒤 윤 후보의 50조 원 지원 공약에 대해 “당장 가능한 방안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추가경정예산을 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최근 통과된 내년도 초슈퍼 예산안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추경 편성 애드벌룬을 띄운 것이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은 “집권하면 100조 원대 투입을 검토할 것”이라며 지원금을 두 배나 올렸다. 이 후보는 “진심이라면 환영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묻고 더블로 가’를 외치는 도박판을 연상케 한다.
포퓰리즘 진원지는 기본소득이다. 이 후보는 경기지사 시절 기본소득·대출·주택 등 ‘기본 시리즈’ 구상을 밝혔다. 이어 지난 7월 연간 ‘전 국민에게 100만 원, 청년에게 200만 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공약을 내놓았다. 지난해 9월 당시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정강정책 1조1항에 ‘기본소득’ 문구를 서둘러 넣었다.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기본소득을 나눠주면 국가 재정 악화와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고 근로 의욕을 떨어뜨린다. 그러잖아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국가 부채 비율이 가장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데 기본소득까지 도입하면 나라 곳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두 진영의 대표적 ‘타짜’는 이 후보 자신과 윤 후보의 대리인 격인 김 위원장이다. 이 후보를 대선 링에 오르게 한 것은 성남시장 시절 청년 배당 등 무상 복지사업이었다. 독일 대학에서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의 분배와 재분배’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 위원장은 ‘경제 민주화’를 명분으로 기업 규제 3법 도입 등을 주장해왔다. 선심 정책에서 ‘난형난제’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모두 파이 키우기보다는 파이 나누기에 주력해왔다.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포퓰리즘 광풍이 불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달 우리 국민 65.1%가 기본소득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모노리서치)도 나왔다. 이 후보는 “국민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기본소득도 추진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래도 대한민국에 희망이 남아있는 것 같다. ‘망국으로 가는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유권자들이 포퓰리스트의 ‘달고나’ 공약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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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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