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와이너리 여행을 한다. 여름에는 친구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나파 밸리나 소노마 카운티, 혹은 몬터레이 쪽을 돌아온다. 겨울에는 가족과 함께 가까운 산타바바라로 간다. 괜찮은 와이너리 한두 곳에서 테이스팅을 하고, 바닷가며 예쁜 상점들을 구경하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하루여행이다. 때론 파소 로블스까지 올라가 아름다운 캠브리아 해변에서 일박하고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즐길 때도 있다.
와이너리 여행에서 사온 와인들은 두고두고 유용하게 마신다. 특별한 날 따기도 하고, 선물도 하고, 잘난 체하면서 기분 내기에 딱 좋다. 직접 방문했던 곳에서 마셔보고 사온 와인은 맛도 확실하지만, 여행했던 그 시간과 공간의 흥분을 고스란히 되살려주기 때문에 살짝 추억과 감상에 젖는 여유도 선사한다. 인생이란 그 잠깐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띄엄띄엄 점으로 이어져 나머지 고해의 바다를 견디게 해주는 인색한 여로 아닌가.
올해는 산타바바라에서 한 시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는 산타마리아(Santa Maria)를 찾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흘러들어오는 특이한 지형 덕분에 연중 서늘한 날씨가 이어져 질 좋은 샤도네와 피노 누아, 시라와 그르나슈가 나오는 지역이다. LA에서 꼬박 세 시간 드라이브라 하루에 다녀오기는 좀 빠듯하지만, 그래도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 좋은 와이너리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2년 전 방문했던 ‘프레스킬’(Presqu’ile)도 무척 인상 깊었는데, 올해는 깜짝 놀라게 더 맛있는 ‘폴 라토’(Paul Lato)라는 곳을 찾았다.
‘폴 라토’는 자체 포도밭도, 멋진 건축물도, 심지어 테이스팅 룸이나 그 흔한 와인클럽도 없는 ‘부티크’ 와이너리다. 중가주와 북가주의 여러 빈야드에서 최상급 포도를 사다가 자신들만의 섬세한 양조법과 블렌딩으로 고품격 와인들을 빚어낸다. 몇몇 와인전문지에 실린 평이 좋아서 예약(필수)하고 찾아갔는데 놀라운 발견이었다.
우선 일반 서버가 아닌 마케팅 책임자가 전문적인 설명과 함께 테이스팅을 진행해주어서 이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안고 시음할 수 있었다. 커머셜한 포장이 하나도 없다는 점도 좋았다. 팬시한 건물이나 인테리어 없이 오크통이 한 켠에 쌓여있는 창고에서 오로지 우리끼리 와인을 이야기하며 와인에만 포커스할 수 있었던 테이스팅이었다. 샤도네와 피노 누아, 시라 등 7종을 시음했는데 하나같이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만드는 와인 종류가 무려 40여종에 달하는데, 총 생산량은 5,000케이스밖에 안 된다고 했다. 레이블 당 1~200케이스밖에 안 나오는, 희귀한 상품인 셈이다. 당연히 와이너리를 더 키울 계획이겠다고 묻자 아니, 지금으로 만족하고 있고 더 확장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완전 맘에 들어~, 이런게 장인정신 아닌가!
산타마리아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팍슨(Foxen)에 들렀다. 전에도 여러 번 갔던 와이너리로, 품종별로 고르게 괜찮은 와인을 만들고 대중적인 곳이라 예약 없이 들렀는데 곧바로 시음할 수 있었다. 야외에 설치된 10여개의 시음 테이블이 모두 찼고, 와인을 따라주는 서버들이 바삐 돌아다닐 정도로 방문객이 많았다. 찬바람이 심해서 와인 향기조차 제대로 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맑은 공기와 청명한 하늘 아래 마시는 와인의 맛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산타바바라 와인컨트리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산타바바라 다운타운에서 30분 이상 북쪽으로 올라가야 나온다. 로스 올리보스, 산타리타 힐스, 산타 이녜즈, 롬폭, 해피 캐년, 발라드 캐년 등 미국와인재배지명칭(AVA)에 등록된 7개 와인산지에 200여개의 와이너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LA에서 가까운데다, 콧대가 하늘 끝까지 높아진 나파 밸리에 비하면 아직 한결 인간적이어서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LA와 가깝다는 입지적 조건은 관광객과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도록 만들었고, 오랫동안 캘리포니아의 다른 와인산지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산타마리아를 비롯한 이 지역에도 진지한 와인메이커들이 점점 많아져 생산량은 많지 않아도 자기 철학이 담긴 반짝이는 와인을 만드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멋진 테이스팅 룸이나 건축물은 없어도 좋은 와인에 대한 열정과 패기, 다양한 경험과 정보를 가진 젊은 와인메이커들이 새롭고 신선한 와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으로 집에만 갇혀서 일하다가 장거리 소풍에 나서자 콧바람이 절로 나왔다. 프리웨이를 올라타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지더니 산과 들과 계곡과 바다, 자연이 펼쳐지는 구간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큰 숨과 가벼운 탄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겨울 포도밭은 굽이굽이 벌거벗은 언덕의 파노라마다. 앙상해진 포도밭, 거친 줄기만 드러낸 채 지지대에 매달려있는 포도나무들을 지나노라면 마음이 낮아지고 비워지고 썰렁해진다. 지치고 분주한 연말, 한해 쌓인 마음의 쓰레기를 깨끗이 비워내기에 이보다 좋은 나들이도 없을 것이다. 와이너리 여행은 캘리포니아에 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다. 이 소소한 행복을 좀 더 자주 즐길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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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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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She is so into that wine thing.... I still have that bad taste of her last essay of Ex president Chun"s relative thing. Please stop this in such a difficult covid time!!
헛참.. 기껏 포도주 이야기라.. 내입엔 숭늉 한사발이면 족한데.. 평소 좋은 문장가라고 여겨 들어와 읽고 실망만 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