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은 ‘팡테옹’(Pantheon)이다. 로마의 ‘판테온’을 본 따 돔 지붕을 얹은 이 건축물은 프랑스의 국립묘지다. 하지만 한국의 현충원이나 미국 알링턴국립묘지와는 달리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위인’이라고 평가된 사람만이 묻힐 수 있다.
1791년 건축된 후 지난 230년 동안 이 웅장한 납골당에 묻힌 사람은 단지 81명, 남성 75명 여성 6명이다. 마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 자크 루소, 볼테르, 알렉상드르 뒤마, 앙드레 말로 등… 이들 대부분은 사망 직후 안장된 것이 아니라 역사가 그의 업적을 평가한 후 사후에 이장되었다. 반대로 먼저 팡테옹에 묻혔다가 훗날 역사의 심판에 의해 퇴출된 사람도 적지 않다.
프랑스의 대통령들은 임기 중 한번 위인을 선별하여 팡테옹에 안장할 권한을 갖는다. 자크 시락 대통령 때 알렉상드르 뒤마가 이곳에 이장되었고, 프랑수아 올랑드 때는 4명이나 이장됐는데 남녀평등을 요구하는 사회분위기를 반영, 여성 두명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결정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팡테옹 안장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여론은 사르코지 같은 반 진보적 인물이 진보성향 작가인 카뮈의 안장을 결정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철회를 주장했고,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
지난 11월30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권한으로 한 여성이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미국출신의 가수 겸 댄서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1975). 여성으로는 6번째, 흑인여성으론 처음이며, 미국 출신자로서도 처음이다. 사후 46년 만에 프랑스 최고의 영예를 차지한 조세핀 베이커는 20세기 초 파리의 최고 인기스타였고,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였으며, 전후에는 미국 민권운동과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선 입지전적 인물이다.
조세핀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가난한 세탁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쥐가 들끓는 지하실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그는 13세 때 집을 나와 클럽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보드빌극단을 따라다녔지만 ‘너무 마르고 너무 검어서’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1925년 19세 때 파리로 건너간 그는 유명한 폴리스 베르제 극장에서 도발적인 찰스턴 춤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블랙아메리카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었다.
큰 키에 대담하고 섹시하고 유머 넘치는 그의 춤과 노래는 파리를 매료시켰으며, 한동안 도시 전체가 ‘브론즈 비너스’ ‘흑진주’ ‘크레올 여신’의 출연을 알리는 카바레 포스터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의 공연에 헤밍웨이, 장 콕토, 피카소 같은 작가들도 “이제껏 본 최고의 공연”이라며 열광했고, ‘내겐 두 애인이 있어요’(J’ai deux amours)란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두 애인은 그가 태어난 미국과 자신을 환영해준 새 조국 프랑스를 의미한 것이다.
유럽에서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미국 공연은 참담한 실패였다. 뉴욕타임스는 공연리뷰에서 베이커를 ‘검둥이 계집’(Negro Wench)이라 썼을 정도로 인종차별적이었다. 그녀는 훗날 “많은 왕궁에 들어가 왕들과 여왕들을 만났고, 대통령들의 관저에도 드나들었지만 미국에서는 호텔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실 수가 없었다.”고 탄식했다.
베이커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반 나치 레지스탕스에 가입하여 앰뷸런스 운전수, 정보원, 여성항공보조대 장교로 활약했고, 미모와 스타덤을 이용해 스파이로도 활동했다. 그는 대사관 외교파티에서 들은 중요한 내용을 손바닥과 팔에 메모해두었다가 악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첩보활동을 벌였다. 이 군사적 공로로 레지스탕스 메달과 무공십자훈장, 그리고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그는 화려한 스타를 넘어서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50년대 이후 베이커는 자주 미국을 방문해 인종차별 폐지운동에 앞장섰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집회에서도 연설한 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 흑백분리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1만달러의 출연료를 제안한 백인클럽에서의 공연을 거부해 KKK의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킹 목사가 암살된 후 부인 코레타 킹 여사는 베이커를 찾아가 남편이 이끌던 시민평등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리더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한동안의 숙고 끝에 그는 아이들이 “엄마를 잃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세번 결혼한 그는 총 12명을 입양했는데 백인, 흑인, 아시안, 인디언, 아랍인, 유대인 등이 어우러진 이 아이들을 조세핀은 ‘무지개 대가족’이라고 불렀다. 생애 후반 재산을 모두 잃고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제공한 모나코의 한 아파트에서 말년을 보내던 베이커는 1975년 공연 후 뇌출혈을 일으켜 타계했다.
지난 주 팡테옹에 안장된 그의 석관에는 미국의 흙과 프랑스의 흙이 한줌씩 담겼다. 프랑스 국기를 두른 석관 옆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는 조세핀이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 프랑스인, 흑인, 여성을 떠나 자유롭고 존엄하며 용기있는 인간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프랑스가 조세핀 베이커를 만들었다. 그녀가 태어난 조국, 미국의 정신과 가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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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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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우러져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며 믿고 의지하며 차별없이 행복하게 자유롭게 사는 지구촌 요게 진짜 만물위영장이라 할수있는 인간들이지요 고런데도 ....ㅉ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