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 가면 해시계가 있다. 신기하듯 주위에 사람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해시계의 시간을 알기는 생각보다 쉽다. 먼저 날의 절기를 알아야 한다. 절기를 나타내는 가로선을 따라가면서 영침(影針)의 끝에 그림자가 맺히는 세로선의 지점을 찾으면 된다. 중앙의 세로선이 12시이므로 왼쪽으로 가면 오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오후다. 영침의 그림자의 시간에다 시차보정표에 따라 보정 시간을 더하면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다 보면 복잡하게 느껴진다. 요즘 같은 그냥 시계나 스마트폰을 보면 금세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번거롭게 계산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원래 시간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는데 시대마다 문화마다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 측량하고 일정한 단위로 분절해 정확한 시점을 파악하고자 했다.
현대인은 보통 시간을 시간 단위나 분 단위로 쪼개서 생활한다. 출근해서 일하다가 “회의 시간이 다 됐다”거나 “점심시간이 됐네” “벌써 퇴근할 시간이네”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반복된 생활을 하다가 간혹 분과 시보다 더 큰 시간의 단위를 의식한다. 계절이 바뀔 즈음에 “벌써”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참 빠르다”라고 말하고 연말이 다가오면 “벌써 한 해가 끝나가는구나”라고들 한다.
오늘날 양력이 보편화하기 이전에는 일력은 음력으로, 절기는 양력으로 함께 사용했다. 음력만 사용하면 농사시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11월7일이 24절기로 치면 입동이었다. 입동의 한자를 물으면 의외로 ‘入冬’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봄이 오면 대문 앞에 ‘입춘대길(入春大吉)’로 쓰는 경우도 있다. 입동은 겨울로 들어서고 입춘은 봄으로 들어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한자는 ‘입동(立冬)’이고 ‘입춘대길(立春大吉)’이다. 이때 입(立)은 사람 인(人) 자가 있는 위(位)와 의미상으로 많이 겹치는데 ‘立冬’은 절기상으로 가을의 자리가 끝나고 겨울의 자리가 시작돼 주도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를 줄이면 그간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이제 자기 자리에 나타나서 선다는 뜻이 된다. 들어간다는 입(入)이 밖에서 안으로 옮긴다는 공간적 특성을 드러낸다면 서서 주도한다는 입(立)은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서 활동을 한다는 시간적 특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24절기는 태양의 황도에 맞춰 1년을 15일 간격으로 24등분해 계절을 구분한 것이다. 입동이 지나고 눈이 오는 시기가 다가오니 소설과 대설이 차례대로 시작된다. 절기만 보더라도 눈이 언제 올지 그 흐름을 일별할 수 있다. 24절기의 숫자를 압축하면 4계절이 된다.
아직 가을 단풍의 뒷자락이 남았지만 겨울이 조금씩 깊어지는 계절이다. 계절의 특성을 한 단어로 말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마천은 ‘사기’의 ‘태사공자서’에서 말했다.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한다. 이것이 하늘 길의 큰 규칙이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세상의 기틀을 세울 수가 없다(춘생하장·春生夏長, 추수동장·秋收冬藏, 차천도지대경야·此天道之大經也, 불순즉무이위천하강기·弗順則無以爲天下綱紀).” 압축하면 생장수장(生長收藏)이 된다.
생장수장은 농경사회의 한해살이를 간명하게 보여주지만 오늘날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생장수장의 사이클을 1년에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번 되풀이하며 바쁘게 살 뿐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나 작업 공정이 생장수장의 사이클을 돌며 마무리되면 또 다른 일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장수장의 사이클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축적을 통한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할 수 있다. 반면 생장수장 중 하나의 고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발전이 주춤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결실의 시간에 거두는 것이 없으면 다음에 갈무리를 할 것도 없고 씨를 뿌릴 것도 없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인 만큼 결실의 계절에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다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온정의 눈길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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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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