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 체제에서 부통령직은 특이한 직책이다.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다. 헌법이 부통령에 부여한 가장 중요한 직무는 연방 상원의장 자격으로 가부 동수일 때 가냐 부냐를 결정하는 캐스팅 보트를 던지는 것이다.
그외에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연구 보고서를 만들거나 대통령을 대신해 행사장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고작이다. 미국의 첫번째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는 8년간 이런 일을 하다 넌덜머리를 내고 부통령직을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가장 하찮은 공직” 이라고 불렀다. 레이건 밑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낸 아버지 부시 역시 너무 많은 장례식에 참석하다 지친 나머지 “당신이 죽으면 나는 비행기를 탄다”(You die. I fly.)라는 말을 남겼다.
원래 부통령직은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아깝게 떨어진 후보를 위로해주는 성격이 강했다. 1787년 만들어진 연방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대통령, 차점자를 부통령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조지 워싱턴이 3선 연임을 거부하고 낙향한 후 치러진 1796년 선거에서 대통령은 존 애덤스, 부통령은 차점자인 토머스 제퍼슨이 당선됐는데 두 사람은 정적이자 앙숙이었다. 집안꼴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1798년 행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금지하는 ‘외국인 반역법’이 통과되자 애덤스를 비판해 온 현직 부통령 제퍼슨이 이 법 위반으로 잡혀가는 사태가 벌어질 뻔도 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804년 수정헌법 12조가 통과돼 선거인단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따로따로 선출하게 하고 대통령 후보가 러닝 메이트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그 후부터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당에서 나오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통령은 연방 공직 중 가장 별 볼 일 없는 직책의 하나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토록 하찮은 직책이 대통령 유고시는 갑자기 미국에서 가장 힘있는 자리로 탈바꿈 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통령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시오도어 루즈벨트, 해리 트루먼, 린든 존슨 등은 전임자가 암살되거나 병사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음에도 권좌를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지난 주말 바이든 대통령이 정기 검진을 하면서 대장 내시경을 하는 85분 동안 부통령 카말라 해리스가 잠시 대권을 인계받았다. 짧은 시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권좌에 앉아 봤지만 지금 해리스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은 바이든의 79세 생일이기도 했다. 취임 1년도 안 된 바이든 지지도는 40%가 깨지면서 역대 대통령중 최하위를 달리고 있고 그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하버드-해리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8%는 그가 대통령을 하기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53%는 직을 수행할 정신적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지금 이 정도인데 3년 후에는 어떠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바이든의 재출마를 비관하는 이유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대통령이 재출마하지 않을 경우 가장 덕을 보는 사람은 부통령이다. 그러나 해리스의 문제는 본인의 인기가 대통령보다도 낮다는 점이다. 최근 한 여론 조사 결과 해리스는 27%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바이든보다도 10% 포인트 이상 낮은 숫자다. 해리스는 2020년 대선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일찍 중도 사퇴했고 대다수 민주당원이 흑인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도 7등을 했다. 해리스가 대선 기간 중 보여준 것은 바이든을 강력히 공격했다는 것뿐이다.
미국 역사상 부통령으로 있다 출마해 바로 대통령에 뽑힌 사람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마틴 밴 뷰렌, 아버지 부시 등 4명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을 낮게 만들고 있다. 거기다 워싱턴 경력 40년의 바이든이 보기에 신참에 불과한 해리스가 행정부 내에서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해리스 측은 바이든이 자초한 멕시코 국경 밀입국자 폭증 등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를 부통령에게 떠넘겨 인기 하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부통령이란 자리가 원래 빛보기 어려운 직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이든과 해리스의 인기가 추락하면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이다. 젊고 똑똑하며 유능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는 미 역사상 첫번째 주요 정당의 동성애자 대선 후보로 주목을 받았는데 동성애자라는 점이 민주당 내에서는 강점일지 모르지만 본선에서는 약점일 수 있다. 미국인 대다수가 동성애자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주자에 대한 민주당의 고민은 당분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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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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