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맞은 국가의 지도자는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사탕을 마구 나눠주거나 링거 주사를 놓는 것은 손쉬운 길이다. 다른 길은 쓴 약을 주거나 대수술을 하는 것이다. 2003년 독일은 ‘유럽의 병자’라 불렸다. 경제성장률은 -0.4%까지 추락했다. 당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골자로 하는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였다. ‘해고제한법’ 적용 대상을 기존 5인 이상에서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완화했다.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당초 32개월에서 최소 12개월까지 단축했다. 사민당 소속이었던 슈뢰더는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자층의 이탈로 2005년 총선에서 패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르츠 개혁으로 독일의 고용률은 2003년 64.6%에서 2019년 76.7%로 크게 높아졌다. 결국 슈뢰더는 ‘독일병(病)을 고친 리더’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역주행하는 나라도 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10월 초 볼리바르 지폐에서 ‘0’을 여섯 개 빼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연간 물가상승률이 수천 %에 이르기 때문이다. 석유 매장량이 세계 최대 수준인 베네수엘라는 한때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부터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까지 22년 동안 좌파가 집권하면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무상 교육·의료, 토지 분배 등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갈림길에 놓여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대에 진입했으나 잠재성장률이 추락하는 가운데 나랏빚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30년부터 2060년까지 한국의 1인당 잠재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연간 0.8%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면 우리의 성장률은 OECD 38개국 중 캐나다와 공동 꼴찌가 된다.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는 한국의 GDP 대비 일반 정부 부채 비율이 올해 말 51.3%에서 2026년 66.7%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같은 증가 폭은 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한 35개국 중에서 가장 크다. 자산·소득 양극화 심화까지 감안하면 ‘한국병’이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야 양대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아직까지 수술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외려 표를 얻기 위한 돈 뿌리기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기본소득·기본주택 공약에 이어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 카드까지 꺼냈다. 이에 질세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새 정부 출범 후 100일 동안 50조 원을 투입해 자영업자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장 인기는 없지만 국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개혁 과제에 대한 논쟁은 실종됐다.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공무원연금 적자는 올해 4조3,000억 원에서 2030년 9조6,000억 원으로 급증한다. 군인연금 적자 폭도 커진다. 국민연금 기금도 2040년 적자로 돌아선 뒤 2054년 완전히 고갈된다. ‘더 내고 덜 받는’ 쪽으로 재설계해야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연금 문제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더욱 ‘기울어진 노사 운동장’은 노동시장 경직성을 키우고 노조의 불법 행위를 조장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19년 14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97위, 노사 협력은 130위에 머물렀다. 노동 유연성을 높이고 노사 협력을 강화해야 성장률을 제고하고 청년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리더십이 국가 운명을 가른다. 당장 단물이나 달고나를 입에 물리면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반면 백신 주사를 놓거나 메스를 가하면 병의 악화를 막고 고칠 수 있다.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한국병 치유’다. 후보들이 명의가 되고 싶다면 ‘쩐의 전쟁’에서 벗어나 국민을 설득하면서 인기 없는 개혁도 추진할 각오를 해야 한다. 지속적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는 희망의 나라를 만들려면 유권자들도 달라져야 한다. 연금·노동 개혁과 관련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는 후보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슈뢰더와 차베스 중 누가 나라를 살렸는지 복기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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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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