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프가 만난사람 - 영화배우에서 세탁소 주인으로, 이구순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 인간의 삶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워싱턴 한인들과 함께 살아온 제프 안(안용호) 씨가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미주사회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인물들을 접하며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느낀 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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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등지고 사는 사람 같아
내가 아는 배우 이구순 씨는 인상파다. 늘 표정이 일그러져 있어 싸울 태세였다. 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남자 같은 모습으로 술을 마셨다. 말씨도 고상치 않아서 잘 아는 처지도 아니건만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깔았다. 연예인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를 10년 만에 만났다. 모 라디오 진행 본부장으로 근무하는 그를 만나니 오랜 옛 정이 물씬 넘쳤다. 일찍 와서 대기실에서 기다렸던 나를 보자 “어~~ 왔어” 하며 상전 노릇을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런 그가 밉지가 않다. 이런 것이 연예인 특권인가? 아니면 미운 정 고운 정이라 하는가? 여하튼 반가웠다.
# 영화 ‘씨받이’ 의 주인공
그는 ‘씨받이’라는 1986년 작 영화의 주연이었다. 20년 전 세탁협회에서 같은 세탁인으로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나는 공무원, 그에게는 영화인이라는 전직이 있었지만 서로 전직에 대하여 단 한마디 한 적이 없다.
무언으로 서로 들이키던 소주잔들과 무수히 떨어져 내리던 옛 그림자들…. 그나 나나 맨몸 하나로 죽자고 뛰어든 세탁업은 힘겨운 역경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그가 국회 의사당 뒤편에 공장을 차렸다는 희소식이 들렸다. 협회 회장이었던 내가 그를 찾아가니 그의 공장은 사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업이 잘되면 얼굴이 피어 있어야 할 사람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몇 마디 말도 안 나누었는데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다고 자리를 떴다. 그의 사뭇 불안정한 행동이 옛날 TV드라마 ‘도망자’의 데이빗 젠슨 모습과 흡사했다.
허우대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과 사업이다. 당시 송대관과 태진아 씨가 미국에서 고생 끝에 귀국한 후 다시 옛 명성을 되찾고 한참 잘 나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가 잘 나가는 전 동료들의 모습을 TV에서 보는 것이 힘들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 도시 미화와 함께 사라진 한인 상인들
또 몇 해가 지나는 사이 DC 전 지역에 도시 재개발이라는 쓰나미가 몰려왔고 gentrification (도시 미화)이라는 쉽지 않은 단어를 앞세워 도시 전체가 성형수술에 들어갔다. 어두움을 걷어내는 대수술의 뒤안길에 함께 묻혀 떠나야 했던 수많은 한인 상인들 중 하나가 그였다.
어느 화사한 봄날 그의 공장에 들러 한때 우범지대였던 그 지역 변천사에 놀라며 “이제는 백인들이 걸어 다니네?” 하며 상당히 고무된 듯 말하자 “안 회장, 여기 이제 딴 세상이야. 그런데 Landlord(임대주) 때문에 죽을 맛이야” 하며 죄 없는 옷 바구니를 발로 찼다.
그리고 몇 달 후 무더운 복날에 찾아간 그의 가게는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없었고 그 자리에 새로이 입주한 7-11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그가 신기루 사라진 듯 아련했다.
# 장총 들고 보초 서던 가게 주인
‘멍’ 때리다 보니 건너편 한인이 운영하던 마켓도 폐업하고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1980년대 그 마켓의 주인아저씨는 강도에 진저리를 치며 목수를 시켜 계산대 위쪽에 다락방을 설치했다. 그는 장총을 구입해서는 마치 DMZ에 설치된 초소처럼 그 다락방 안에서 장총을 빠끔히 내비치며 강도질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실력 행사를 했다.
당시 권총은 불법이었지만 장총은 소지가 합법이었기에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물론 강도 사건도 한순간 멈추었다. 현재 그 마켓 자리는 커피숍으로 변해 옷단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장총 들고 서있던 주인아저씨와 같이 세탁소 주인 이구순 씨 역시 바람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10년 만에 만난 그는 방송인으로 변신하여 요즘 소매 사업 경기가 안 좋다는데 현장 상황을 듣고 싶다며 나 와 미련 곰탱이 강하석 사장님을 방송 게스트로 초청했다. 그를 본 순간 누구나 제 물에서 놀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녹화 실에서 본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자신감과 남자다움이 좋았다.
# 환영하는 삶을 살자
이구순 씨가 환히 웃으며 “안 회장 오랜만인데 피날레로 흥겨운 트로트 틀까?” 하자 “Welcome to My World로 해줘요. 옛날 대한항공 타면 그 잔잔한 기내 음악이 좋았는데 이제 우리들 인생에서도 환영하는 삶을 살아 봅시다.”라고 했다. 그가 곧바로 음악을 배경으로 뿌린다.
고국을 떠나던 그날,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들떠있었다. 바다보다 푸른 하늘 위를 날며 흰 구름 속을 헤쳐 나오며 나름 꿈이 있었다.
언제였던가. “미국 참 사람 우습게 만드는 나라야” 하며 자조 섞인 말로 위안을 삼던 이구순 씨가 떠올랐다. 영화인에서 세탁인 그리고 다시 방송인으로 거듭나는 그의 성공을 기리는 마음이 내 마음뿐일까? 그의 건승을 빌며 삶의 여정에서 당신의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지 묻고 싶다.
문의 Jahn20@yahoo.com
▲ 제프안 약력: 1.5세대이며 1976년 이민 와서 미군과 경찰 경력을 거친 후 현재 WAVA Corp의 대표로 있다. IFI 전국 이사, 워싱턴세탁협회와 시민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UVA Sorensen Institute 졸업,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 조지 타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제프의 시간여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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