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를 보러 갈 때는 준비가 좀 필요하다. 공연이 보통 4시간이나 계속되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맷집’을 좀 키워야하는 것이다.
우선 졸지 않으려면 저녁식사는 두세 시간 전에 일찌감치 마치고, 나중에 출출해질 때를 대비해 간단한 쿠키나 초컬릿을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인터미션이 두 번이나 되니 그중 한번 정도는 물이나 커피나 와인 등으로 목을 축이면 좋은데, 바에는 언제나 줄이 길게 늘어서므로 공연 시작 전에 미리 오더 해놓는 준비도 필요하다.
옷차림은 단정하지만 편안해야한다. 오페라 본다고 너무 차려입었다간 앉아있는 내내 불편할 수 있다. 내용을 미리 공부하고 가는 것은 필수, 자막을 좀 건너뛰더라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언제 중요한 아리아가 나오는지 알아두면 오페라 감상이 훨씬 즐겁다.
LA 오페라가 지난 16일 개막한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이다. 내용이 단순할뿐더러 아름답고 호소력 짙은 음악 때문인데, 유명한 서곡으로부터 ‘순례자의 합창’ ‘입당행진곡’ ‘아름다운 저녁별’ 아리아 등은 오페라 팬이 아니어도 귀에 익은 곡들이다.
탄호이저는 13세기 독일에 실존했던 음유시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몇몇 서적과 그림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탄호이젠 영주의 후손이며 오스트리아 프레데릭 2세의 궁신이었고, 독일기사단 복장을 입은 모습에서 십자군전쟁에도 참여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바그너는 ‘참회의 시’를 남긴 탄호이저의 전설에 ‘노래경연대회’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결합해 직접 오페라의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그의 희가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도 노래시합에 관한 것이니, 말하자면 ‘수퍼스타K’나 ‘케이팝스타’ ‘싱어게인’ 같은 행사가 중세에도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탄호이저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살고 있는 비너스베르크(Venusberg)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밤낮으로 환락과 쾌락에 빠져 살다가 어느 날 돌연 후회하고 인간세계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여인 엘리자베트가 있고, 그와 함께 노래대결을 벌이곤 했던 음유시인 친구들이 있다. 그가 돌아온 것을 반기며 새로운 시합이 열리는데 주제는 ‘사랑의 본질’.
탄호이저의 친구이자 엘리자베트를 사모하는 볼프람이 제일 먼저 노래한다. “순결하고 이상적인 사랑은 맑은 시냇물과 같아서 깨끗한 샘물에 함부로 손대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 탄호이저가 일어나 “지고의 사랑이란 감각의 즐거움으로만 얻을 수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비너스베르크에 가보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그가 타락과 금단의 장소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동은 모두 달려들어 죽이려하지만 엘리자베트가 애원한다. 이제 그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교황의 사면을 받는 것이다. 그는 순례자들과 함께 로마로 가지만 교황은 용서를 거부한다. 탄호이저가 용서받는 것은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꽃이 피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천년의 중세는 성과 속의 이분법적 사고만이 통하던 시대였다.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은 양립할 수 없었고, 정신과 육체는 대결했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성(질서)과 관능(예술)은 화해가 불가능했다. 정신과 영혼은 선하고,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사를 지배해왔다.
물론 오늘날 이런 관념은 사라진지 오래고, 현대사회에서 정신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몸과 정신으로 이뤄진 유기체이고, 사랑은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모든 요소의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역전된 이원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정신과 영혼은 간 곳이 없고, 육체와 물질만이 너무나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한국에서 심한데 현재 한국의 의과대학에서 가장 인기과목은 1위 피부과, 2위가 성형외과라고 한다. 더 극단적인 예는 ‘오징어게임’이다. 이 게임에 참가한 456명은 오로지 물질을 위해 목숨을 건다. 물질이 너무 많아 인생이 지루한 VIP들은 이들의 목숨에 물질을 베팅한다. 현대사회에서 영과 육의 부조화, 부와 빈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져가는 거대한 크레바스와 같다.
그건 그렇고, LA오페라의 ‘탄호이저’는 기대 이상이었다. 바그너 오페라는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고, 바그너 전문가수들이 아니면 안 하니만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탄호이저(이사차 새비지), 비너스(율리아 마토치키나), 엘리자베트(사라 자쿠비악), 볼프람(루카스 미첨), 주역 4인의 소리가 모두 얼마나 좋던지 깜짝 놀랄 정도였고,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도 대단히 훌륭했다. 다만 세트를 포함한 프로덕션이 별로였는데, 특히 1막 비너스베르크에서의 향연은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비너스와 요정들이 벌이는 광란의 연회 장면은 반라의 무희들이 관능적이고 노골적으로 춤을 추는 주지육림이라 어떤 프로덕션은 19금 논란이 빚어지기도 하는데 LA오페라는 이 중요한 장면을 너무 얌전하고 재미없게 처리했다.
그래도 바그너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번 ‘탄호이저’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 11월6일까지 5회 공연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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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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