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코헬렛서 3장 1절의 8절. 인생이 퍽퍽하다고 느낄 때면 조앤 치티스터 수녀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책을 어김없이 찾아 든다.
저자는 인생에서 다양한 때가 있고, 삶의 각 순간들이 연결돼 최종적으로 하나의 드라마가 되기에 의미없는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최근 반 고흐의 전시를 다녀오고서 불운의 천재 화가 ‘반 고흐의 때’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됐다. 한 평생 화가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숨진 그의 때는 언제인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은 현대 화가인 동시에 살아 생전에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단 한 장의 그림 밖에 팔지 못한 불운의 화가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도 알려진 그는 27세부터 약 10년간 화가로서 활동했는데 드로잉과 스케치를 포함해 약 2,000여 점의 걸작을 세상에 남겼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그림들은 현대 미술사에 새 생명을 불어 넣었다.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다 37세에 스스로 생을 끊는다. 평생 형을 후원했던 동생 테오 또한 깊은 슬픔과 충격으로 인해 6개월 뒤 숨진다. 반 고흐의 그림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테오의 부인 요한나 봉허의 노력 덕이다. 요한나는 남은 생 동안 반 고흐의 작품들을 세상에 알리고, 반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반 고흐를 세계적인 화가 반열에 올려놓는 데 열과 성을 다한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반 고흐의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순위가 매겨지고, 반 고흐는 현대 미술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지난주 LA에서 개막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인 ‘이머시브 반 고흐(Immersive Van Gogh)’에 다녀왔다. 이 전시는 프로젝션을 통해 고흐의 명작을 벽과 바닥 등에 영사해 관객이 거대한 작품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북미에서는 토론토를 시작으로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에 이어 LA에서도 드디어 반 고흐의 미디어아트 전시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약 1시간 동안 반 고흐의 ‘해바라기(1888)’ ‘별이 빛나는 밤(1889)’ ‘아를의 침실(1889)’ 등의 다양한 대표작들을 웅장한 음악과 함께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반 고흐의 인생사를 공부하고 간 터라 작품들을 감상하며 자꾸만 코끝이 매웠다.
전시를 감상하고 나오는 길, 남편이 문득 말을 꺼낸다. “사후에 인정받는 건 억울하지 않나.” 코로나 시국에도 관객들로 북적였던 반 고흐 전시회를 다녀오자, 정작 화가 자신은 살아 생전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한 말일 것이다. 반 고흐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생에서 ‘성공의 때’를 맞이 했을지도 모른다. 반 고흐는 죽기 직전부터 화단에서 조금씩 알려졌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반 고흐를 때를 맞이하지 못한 불행한 화가로만 여기는 일은 지양하려 한다. 책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맺음말에는 제자가 스승인 랍비에게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살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이에 스승은 “자네가 죽을 때 ‘너는 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 문장에서 막연하게 반 고흐의 때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반 고흐는 한 평생 가난했고 고뇌로 가득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고, 그림에 진심이었던 반 고흐.
반 고흐는 1888년 8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그는 “다음 시대의 화가들이 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발판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썼다. 그는 정식 미술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새로운 기법으로 당대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해도 훗날 미술사의 신화가 될 수 있음을 인생을 통해 보여줬다. 이제는 모두가 그의 인생사와 작품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 ‘고흐의 때’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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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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