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려온 영화박물관 ‘아카데미 뮤지엄’(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윌셔와 페어팩스 코너, 과거 메이 컴퍼니가 있던 자리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를 맡아 백화점 건물(현 사반 빌딩)의 내부를 완전히 뜯어고쳤고, 주차장이던 공간에 거대한 돔형 유리구체를 신축하여 LA에 또 하나의 명물을 만들었다. 바로 옆에는 라크마(LACMA)의 현대미술전시관(BCAM)과 레스닉 파빌리온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두 곳 역시 렌조 피아노가 설계했으니, 세 건축물이 근사한 조화를 이루며 뮤지엄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있다.
25만 스케어피트의 박물관 내부에는 3층에 걸쳐 8개의 거대한 전시장이 있다. 각 룸에는 120년 영화 역사를 망라하는 8,000여점의 기념물이 전시돼있고, 곳곳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에서 수많은 영화 영상들이 돌아간다.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부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신었던 빨간 구두, ‘사이코’ 극본을 썼던 타이프라이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우주복과 달착륙선,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의 특수 분장 및 각종 영화의상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사반 빌딩에서 다리로 연결된 ‘데이빗 게픈 극장’(David Geffen Theater)은 1,500개의 유리패널이 구형을 이룬 독특한 건축물이다. 1,000석의 극장 위에 조성된 광대한 테라스에서는 멀리 할리웃 사인이 보이고, 360도 유리천정 아래서 환상적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우주선 같기도 하고 고래 뱃속 같기도 하며, 영화 팬들이 ‘데스 스타’란 별명을 붙인 건축물이다.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인 LA에 영화박물관이 이제야 세워진 것은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동안 할리웃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갈 데가 없어서 명성의 거리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2000년대 들어 박물관 개관을 추진하면서 원래 선셋 블러버드 인근에 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2008년 9월 건축도안이 발표된 직후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2012년 10월, 아카데미는 메이 컴퍼니 건물에 뮤지엄을 짓는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이 건물은 라크마 소유였다. 라크마는 1994년 문 닫은 백화점을 헐값에 사들여 ‘라크마 웨스트’라 이름 지었고 별관으로 활용할 여러 복안을 세웠다. 1999년 반 고흐 전시회가 열린 곳이 바로 이 건물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이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고, 건물은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아카데미가 110년 임대계약을 맺은 것이다.
예산 2억5,000만달러, 2017년 개관 예정으로 시작된 건축과정은 비용이 계속 불어나고, 모금은 부진하고, 운영진의 내분, 거기에다 글로벌 팬데믹까지 덮치면서 비용과 시간이 모두 2배나 소요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문을 연 아카데미 뮤지엄은 지난했던 과정에 비해 놀랍도록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건축비평에 까다로운 주류 미디어가 모두 칭찬 일색이고, LA 타임스는 뮤지엄의 모든 것을 조명한 24페이지 특집섹션을 발행했을 정도로 무비 타운의 환호와 흥분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렇다 해도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미국사회는 ‘다양성과 포용’(Diversity & Inclusion)이라는 화두에 사로잡혀있다. 인종문제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 단체, 공공기관들이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얘기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과 ‘BLM’ 운동 이후 주류언론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흑인들의 스토리와 업적에 지면을 많이 할애해왔다. 아시안 인종차별이 대두된 후에는 아시안의 얼굴도 부쩍 많이 등장한다. 그동안 소외됐던 사람들을 뒤늦게나마 조명하는 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지, 영화박물관은 이를 너무 의식한 듯해보였다. ‘오스카는 백인일색’(#OscarsSoWhite) 논란과 ‘미투’(#MeToo) 운동의 시발지가 할리웃 영화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30일 열린 화려한 오프닝 세리모니는 아메리칸인디언들의 노래와 축성으로 시작되었다. 오래전 이 땅에서 살았던 ‘선조’들이라며 통바(Tongva)부족 지도자들을 초대해 이들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언제부터 영화계가 미국원주민들을 이처럼 존중했는지, 어리둥절한 장면이었다. 이어 처음 들어가 본 뮤지엄은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가장 의아했던 건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마어마하게 큰 전시였다. 할리웃 영화뮤지엄 개관전의 주인공이 일본 만화영화? 또 다른 전시장에서는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 여러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예의 그 속사포 같은 대사들을 쏘아대고 있었고, 또 다른 방은 ‘모베터 블루스’가 울려 퍼지는 흑인 스파이크 리 감독의 독립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 프랜시스 코폴라, 스티븐 스필버그, 우디 앨런, 마틴 스콜세이지, 크리스토퍼 놀란, 팀 버튼, 제임스 카메론 같은 명장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할리웃 영화의 역사는 백인들의 역사였다.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세계였지만 실상이 그랬다. 그리고 영화팬들이 영화박물관에서 만나고 싶은 것은 클래식 영화의 세계지, 과거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뮤지엄은 반드시 찾아보아야할 곳이다. 영화팬이라면 캔디스토어에 들어간 아이처럼 한나절을 놀아도 모자랄 것이다. 개관 첫날부터 2,400명이 줄서서 기다렸을 정도로 이미 인기가 엄청나다. 머잖아 전세계 영화팬들의 ‘머스트 플레이스’로 떠오를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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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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