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9년 말로 20년 이상 몸 담고 있었던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회에서 은퇴한 후 몇 가지 새로운 자원 봉사 일을 해 오고 있다. 그 중 보람을 느끼면서도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민자를 위한 ESL 수업과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성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다. 책임 교사는 아니고 보조 교사이다. 아직 가르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내가 책임 교사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47년 전 고등학교 시절에 이민을 온 나는 한국어나 영어 그 어느 것도 잘 한다고 내 세울 수 없는 처지이다. 영어도 모르는 어휘나 표현이 많고 한국어도 한국을 떠날 때의 수준보다 더 발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동안 바뀐 철자법이나 문법을 고려할 때 퇴보했다고 보아도 된다. 신조어는 더욱 생소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잘 못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가르치는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나에게도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 올랐다.
대학교 때였다. MIT에서 화공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졸업 논문을 준비했다. 그 친구도 나처럼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왔다. 친구의 요청으로 내가 논문을 살펴보게 되었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영어 문장들만 살펴보았다. “풍선”이란 뜻의 단어가 가장 많이 나왔다. 친구가 “balloon”이라고 제대로 써 놓은 것을 내가 자신있게 모두 “baloon”으로 고쳤다. 친구도 내가 고쳐 놓은 스펠링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논문이 어떻게 심사에 통과했는 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친구는 대학원을 칼텍으로 진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한 번은 로스쿨 2학년 때이다. 형사소송절차법을 배웠는데 인근 경찰서에서 로스쿨 학생들에게 경찰관들의 야간순찰 모습을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경찰차 조수석에 앉아 경찰관의 업무 집행을 참관하는 것이었다. 범죄와 마주 칠 수 있는 최전방으로 보내진다는 느낌에 내심 긴장했다. 그러나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 몰라도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운전하던 경찰관이 차를 길가에 세우더니 업무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보고서를 작성하다 느닷없이 나에게 한 단어의 스펠링을 물어보았다. “호전적”의 스펠링이 “combative”인지 아니면 “combatative”인지를 물었다. 나도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 났다. 그런데 로스쿨 학생이 간단한 스펠링을 모른다고 하거나 우물쭈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자신있게 대답이 나갔다. 그리고 틀렸다. 그 날 이후 그 경찰관을 다시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잘 몰랐던 단어로 식은 땀을 흘렸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로스쿨 때 일이다. 1학년 말 어떤 시험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등장했다. 뜻을 알아야 답을 써내려 갈텐데 큰일이었다. 사전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시간을 마냥 끌 여유도 없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앞에 앉아 계시던 교수님께 다가 갔다. 뜻을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교수님은 다른 로스쿨에서 우리 학교로 1년 동안 초빙교수로 와 계시던, 그리고 당시 가르치던 과목에서 권위자였던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다. 교수님은 내 말을 듣더니 바로 자기가 좀 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하면서 설명해 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나의 부족함을 당신의 부족함으로 너그럽게 덮어 주셨다.
최근에도 모르는 단어가 하나 나와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보조하는 ESL 수업에서였다. 크로스워드 퍼즐을 학생들과 같이 하는 데 “감옥”이라는 뜻의 네 글자로 된 단어를 생각해 내야 했다. 당연히 “jail”이 떠 올랐다. 그러나 첫 글자가 “g”였다. 같이 가르치던 교사가 영국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gaol”이 바로 그 단어인데 발음은 “jail”과 같다고 했다. 나는 처음 들어 본 단어였다. 의미도 발음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던 단어였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떠 올리면서 언어공부는 정말 끝도 없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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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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