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인사회 원로 되시는 분이 우리 부부를 저녁 초대 하고 새로 출간한 ‘제프의 시간여행’을 구매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원로 분의 성함을 물어보니 절대 알리지 말라는 부탁이었다며 그는 함구했다.
내 책을 구입하겠다는 사람을 기피할 수도 없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니 더욱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꾹’ 참았다. 조속히 만나서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졌는데 그 다소 흥분된 기분이 총각 시절 맞선 볼 때의 상기된 기분이었다.
번잡한 식당에 들어서니 조용한 뒷방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지인과 의문의 원로 분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놀랍게도 원로 분은 20년 전에 워싱턴 한인연합회장을 역임하셨던 문흥택(84) 고문이셨다. 서로 웃으며 왜 신분을 안 밝히셨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 시원 시원했고 그다웠다.
얼마 전인가 식사를 함께 한 후 내가 식대 계산을 하면서 그분 손목을 꼭 잡으며 “그동안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계산 할 생각이니 절대 식대 내지 말아주세요” 하며 강경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만나자고 하면 혹시 안 나올까봐 신원을 숨겼다는 말씀에 우리 모두 박장대소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책 두 권에 사인을 하고 건네드리니 원로의 만면에 인자한 웃음이 감돌며 “안 회장, 우리 벌써 안 지가 40년이 넘었어!” 하시면서 그동안의 역사를 잔잔히 전해주신다. 소맥 술잔이 오고 가는 사이 그분이 젊고 힘 있던 시절, 영어도 짧은데 7-11에서 백승환 씨(전 세탁협회장)와 최광수씨(전 수도권 MD 회장) 등을 만나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제 각각 성공의 길을 뛰어왔던 기억들을 말씀하셨다. 그 중에서도 한인들은 동업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여러 명이 합심해서 시작했던 Cash & Carry 도매 사업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였다.
당시 나는 경찰 경사 신분으로 North Capitol과 New York Ave. 그리고 Florida Ave. 등을 마치 앞마당 드나들듯이 헤집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지역 그로서리, 리커, 세탁소들은 모두 한인 소유였다.
옛 이야기로 흥이 오를 무렵 문 고문이 의미심장한 선물함을 나에게 건네 주시면서 “안 회장 시계 수집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제 나이도 들고 해서 안 회장이 적절히 처분해주게나” 하셨다. 그 안에는 수십 가지 선물용 시계들이 들어 있었다. 한인회장 등 여러 직책에 있으셨을 당시 받으셨던 시계들을 내게 주시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지인은 눈치 없게도 “나도 저런 시계 너무 많아요” 하며 사뭇 분위기 파악을 못하기에 나는 더욱 머리 숙여 그 분의 깊은 성의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렸다.
그분에게서 받은 시계들은 예상한대로 대부분이 한국 정치인들 시계였지만 의외의 시계들도 있었다. 복지센터, 향군협회, 골프 협회와 언론사 시계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이 있을 듯 싶었고 서청원, 한화갑 시계는 세월을 말해주는 듯 싶었다. 문 고문은 추미애 시계를 바라보며 현 대통령 후보가 야당 의원 시절 사무실에 찾아가니 너무도 다정히 맞이해주었고 택시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거리 까지 나와서 정중히 마중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는 딱딱하고 상기된 이미지와 너무 다른 면도 있다며 여운을 남기셨다.
건네받은 모든 정치인들 시계들은 원형의 모습이었는데 유독 노무현 전 대통령 시계는 사각형이었고 시계 유리마저 깨져 있었다. 시계 뒷면에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이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다. 그것이 무너지면 안된다는 듯이….
김영삼 전 대통령 시계 뒷면에는 그의 완고한 의지를 보여주듯이 ‘대로무문’ 즉, 큰길에는 문이 없다 라고 적혀있다.
문 고문에게 물었다. “걸어오신 삶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돌아온 답변은 간결 했지만 ‘찡’했다. “가정을 안 돌본 것이 후회 되네.” 남자가 큰길에 나서면 거침이 없어야 된다. 그러나 집 문은 누가 챙기나?
원로와 3시간이 넘는 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한인 커뮤니티 센터에 대한 이야기에 상당한 시간이 할애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받은 시계들은 잠시 내가 소장 하겠지만 언제인가 한인 박물관이 열린다면 그곳에 기증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원로님을 배웅하는데 그 건장 하시던 모습과 카랑카랑 하시던 목소리가 그리워오며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저며 왔다. 귀가길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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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안 WAVA 대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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