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준이 커머셜 컴퍼니 (Junee Fashion) 이준행 회장
이준행 회장(사진) [사진 = 이지훈 기자]
■ 서울대동창회 60대이상 모임 골든클럽 명예회장
■ 2016년 ‘준이 장학재단 설립’ 후세들 지원
■ 65세에 이태리어 배울정도로 ‘보이지않는 교육’ 실천
■ 71년 맨하탄에 가발회사 설립이후 지금까지 한우물
가발과 함께 살아온 92년 인생, 이준행 회장은 아직 현역이다. 비즈니스에 성공한 인물이면서 선후배간 친목도모는 물론 후세들을 위한 장학재단 일에도 열심이다. 그의 삶을 들어본다.
■ 2015년 준이장학재단 설립
서울대 뉴욕동창회는 동문 1,000여명이 도와가며 친목을 나누는데 그중 60세 이상 동문들로 구성된 골든클럽은 신년모임, 골프, 산행, 바다낚시 등을 함께 하면서 인생의 여유와 멋을 찾고 있다.
“매일 사무실 나가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지내고 있다.” 고 근황을 말하는 이준행 회장은 2006년부터 10년간 골든클럽 회장을 지낸 후 2016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지난 6월에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골든클럽 피크닉이 업스테이트 락클랜드 팍에서 열렸다. 당연히 이곳에 왕고참 선배인 이 명예회장도 참가했다.
이 회장은 2015년 가장 뜻있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후세를 위한 준이(Junee)장학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10여년 전 동문 임광수 회장이 한국에 서울대 총동창회 장학빌딩을 지었고 이때 이준행 회장은 20만 달러를 기부했었다.
매년 6%인 1,200만원씩 장학금으로 배당이 되자 뉴욕동창회 5명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이후 장학생 자격이 서울대 재학생으로 제한되면서 현재의 준이장학재단이 따로 만들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생을 대상으로 추천을 받아 장학생을 선정한다. 보통 8명 정도 선발, 2,500달러씩 장학금을 주는데 한 번 받으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지원한다.
“일류 학교가 아니라도, 성적이 좋지 않아도 장학생이 될 수 있다. 공부 못하던 학생도 일단 장학금을 받으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어 공부를 하게 된다. 매년 12월28일경 망년회 겸해 장학생과 부모 초청모임을 열었다. 사람다운 사람, 인격자를 만들어 주려면 부모가 교육에 관여해야 한다.”
그는 65세에 맨하탄 베를리츠 어학원에 이태리어를 배우려고 갔었다. 학교 원장이 “왜 이태리어를 배우려 하느냐?”며 비즈니스나 여행을 가냐고 했다.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교육이다.”
그는 평소 살면서 기죽지 않으려면 나 역시 4개 국어를 함으로써 일생에 많은 혜택을 보았다.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4개국어 습득을 장려한다.
세 아들에서 손자1, 손녀 3을 두었는데 손자는 필라델피아 마취과 의사, 손녀 셋은 영어, 불어, 이태리어를 본토인처럼 말한다. 특히 코넬대에서 패션·매니저먼트를 공부한 큰 손녀는 이태리어를 제2외국어로 택해 현재 이태리 구찌에서 일한다. 바로 할아버지가 모범을 보인 교육 덕분이다.
■ 신용은 믿음
1929년생인 이준행 회장은 7남매 중 맏이로 저축은행에 근무한 아버지로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침에 가방 들고 학교 가기 전에 방안에 붙인 히틀러 사진을 보며 히틀러와 1분간 눈싸움을 해야 했다. 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둑 교육을 받았다. 중2시절 바둑판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 아버지의 따귀가 날아왔다.”
양정중학교, 서울대 섬유공학과 48학번인 이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상공부에서 4년간 근무하고 57년에 여의도 공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이태리 밀라노로 유학을 가 1년간 기계 훈련을 받았고 이후 영국 레스터에서 2년간 유학을 했다.
“1960년대초 한국이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졸업하고 양말수출 사업을 시작한 후 아버지 친구분이 하는 가발 수출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어느 날, 미국에서 가발을 최고로 많이 수입하는 기업 브렌트우드가 나를 찾았다. 나더러 공장 설립에 관한 지원을 모두 할 테니 가발공장 설립을 제안한 것이다. 수출을 장려하는 정부의 방침으로 나날이 가발사업이 발전, 내가 서울에 초대 가발조합원이고 내 공장에 600여명이 될 정도로 가발공장 규모가 커졌다. 1960년 준이상사를 설립, 1971년 맨하탄 27가에 뉴욕가발회사 준이 커머셜 컴퍼니(Junee Commercial 11Co.)를 세워 미주한인 가발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오더 받기가 힘들어 매년 4만5,000달러씩 적자를 내다가 뉴욕 파견 직원들이 발로 뛰었고, 그 결과 도매상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 초 한국 가발 제조업자들과 미국 한인개발 수입업자들도 흑인동네에 가발 가게를 열었고 한인 유학생들도 가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준행 회장은 전국 방방곡곡의 가발 상점과 거래하며 신용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용은 개인이나 거래처간의 믿음을 뜻하므로 신용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발 제품을 공급하지 않았다. 이 신용 덕분에 1980년대말이나 90년대초 시티뱅크 매거진의 표지인물이 된 적도 있다. 1982년에는 뉴욕에 완전 정착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가발 사업이 위축되기 시작하면서 한인들이 가방이나 잡화로 업종을 전환해도 이준행 회장은 여전히 가발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좋은 품질의 가발을 만들고 손님들이 좋은 값에 파는 것은 나의 보람이자 기쁨’이란다.
■ ‘호랑이 아빠’ 좌우명
교육에 관한 한 이준행 회장은 한국에 조기교육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막내아들을 영국에 조기교육 시킨 바 있다.
1974년 초등4학년인 막내아들은 영국 유학을 갔다. 그는 아들과 함께 일본, LA, 뉴욕을 거쳐 런던으로 갔다. 친구 집에 데려다 주고 혼자 호텔로 갔는데 새벽 1시에 친구의 전화가 왔다. 아이가 하룻밤만 아버지와 자고 싶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항에서부터 절대 울어선 안된다고 가족들에게 엄명을 내린 호랑이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히드로 공항에서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돌아오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는 그는 홀로 공부하는 아들이 모국어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야 했다.
매일 한국어로 일기를 쓰면 통장에 하루 90페니씩 석달에 한번 통장에 넣어주었고 두 형들은 소년동아일보를 매일 에어 메일로 보내주었다. 마침내 막내아들의 통장에 돈이 쌓인 날, “너, 자동차도 사겠다‘고 하자 대답이 걸작 ” 이 돈으로 제 아들 영국 보낼 학비로 쓰겠습니다.” 였다고.
영국 명문 사립고 오캄의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 이건혁은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 경제학 박사를 받고 10년간 워싱턴D.C IMF에서 일한 다음 JP 모건을 거쳐 서울 재경원 자문관으로 4년간 일했다. 삼성그룹 부사장을 거쳐 현재 신한금융지주 미래전략연구소 대표이다. 그는 지금도 성장한 아들에게 “안심하지 말고 방심하지 마라, 오만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한다.
그의 좌우명은 명확하다.
“첫째 겸손하게 살아라. 둘째 몸은 낮춰서 살아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랑 밑에 사람 없다. 셋째 열심히 살아라. 이 세 가지를 지키면 못 이룰 것이 없다.” 그는 이렇게 세 가지를 지키고 살면 운이 뒷받쳐 준다고 한다. 한미충효회 장한 어버이상도 수상한 바 있는 이준행은 지금은 자신을 ‘종이호랑이’라고 말한다.
한편 뷰티서플라이 전문월간지 ‘BNB’에 2014년 1월~12월까지 인터뷰한 기사가 ‘가발과 함께 살아온 나의 84년 인생’(한국어/영어) 책으로 묶어져 나왔을 때 참으로 큰 보람을 느꼈다는 그다,
이준행 회장은 이세영씨와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아내는 둘째아들이 12년 전 병으로 사망하자 우울증을 앓았다. 77세 나이에 미주한인서화협회에서 서화를 배우면서 우울증이 치료됐고 2014년 결혼 60주년 기념 회혼례때 전시회도 가졌다. 효당 이세영씨는 2019년 별세했다.
이 회장은 1929년생으로 현재 92세이다. 60년 전과 마찬가지로 롱아일랜드 벨모아 집에서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 사무실까지 월요일~금요일까지 출근 한다.
오늘도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준이패션 사무실에 나가 일하는 이준행 회장, ‘은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이 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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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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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1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기사에다 1929년생 92세를 몇 번 씩 강조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논설위원이면 기자생활 오래 했을텐데 참으로 글을 못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