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숙명이다. 누군가는 부모 잘 만나 평생을 돈 걱정 안하고 산다. 하지만 누군가는 부모 잘못 만나 거주할 집과 일할 직장을 걱정해야 하는 오늘의 암울한 시기를 사는 대한민국의 2030 세대 일 수도 있다. 다수의 후자는 절망의 상황에 빠뜨린 이런 사회제도를 피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출생이라는 우연은 출발선에서는 불공평하다. 타고난 환경은 분명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또한, 성장하면서 내가 남보다 경쟁력이 높은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본인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정 환경의 혜택과 사회 환경의 이용에서 얻은 산물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출생과 불공정한 사회 제도에 좌우되고 고통받는다면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상태의 불평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가 이런 상황을 무한정 자유방임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중세 봉건사회와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는 계층간 양극화를 가속화시켜 그들 사회의 공동체 삶을 망가뜨렸다.
출생 불평등과 능력 불평등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평등이란 이상은 기회 균등을 말하는 것이다. 기회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활성화 개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세율을 높이는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말한다. 자연 세계나 인간 세계의 현실에서는 능력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공평하지 않다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옳은 말 같지만 틀린 말이다. 자연 세계는 각자 약육강식 법칙에 따라 살아가지만 분배 방식에 있어서는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 세계만 불공정하다. 욕심과 소유욕 때문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고소득자 직업군들이 큰 돈을 버는 이유는 직업 윤리의식 결여와 얼키고 설키는 복잡한 상거래와 관련되어 있다. 스포츠 선수나 영화배우 스타들이 큰 돈을 버는 것은 인기스타에게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어 돈을 벌려는 광고주와 스폰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전문 경영인들이 천문학적 보너스를 받는 것은 그들을 독려하며 경쟁 회사를 무너뜨려 큰 돈을 벌려는 기업 소유주나 주주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 부모들이 선호하는 전문직 직업군도 마찬가지다. 로펌은 구속과 형량을 무기 삼아 겁을 주어 불구속과 형량을 낮추는 법률서비스로, 의료 병원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팔아 큰 돈을 챙긴다. 극도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이용한 돈벌이다. 이렇듯, 수입이란 게 서로의 조건이나 이해관계에 형성된 거래의 산물에 불과하다. 자유시장에 살며 상위 포식자에 의해 선택된 행운일 뿐 그들의 능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전문 자격증은 관심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 취득할 수 있다.
여·야 유력 대선 후보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늘 공정과 정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의 철학은 20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스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지난 4월 보궐선거는 2030 젊은 세대가 주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질을 회피하고 현상에만 관심을 가졌다. 능력주의와 공정을 그토록 외치면서도 도덕적으로 옳은 일 이라고 믿는 것에 눈을 감고 거짓과 불의에 동조했다. 공정사회는 상식과 도덕의 토대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취업난·부동산 폭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분노와 증오의 감정으로 투표했다면 옳지 않은 행동이다.
어느 때보다 풍부한 자본, 첨단화된 기술, 숙련된 노동력, 더 탄탄한 인프라를 갖추었음에도 다수가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것은 바로 불공정과 불평등 때문이다. 입시난·취업난·주택난 같은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출주도 성장 과실을 대기업이 모두 가져 가도록 한 잘못된 정책과 법률 때문이다. 경제가 순환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적 상수효과는 상대적 빈곤이라는 감성적 문제를 넘어 비효율적 소득배분과 민간소비의 악화로 성장동력을 훼손하고 경기침체를 불러온다.
고도성장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투자할 돈은 남아돌고 하이테크 시대에는 성장해도 고용이 늘지 않는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제임스 미드 교수가 주장한 ‘사회 배당’ (social dividend) 소득을 국가가 책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국가 보너스는 면세이며 소득 수준·고용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일명 기본소득(basic income)으로 불리워진 혁신적인 복지제도이다.
이재명 후보자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기본 소득도 이와 유사하다. 가용할 수 있는 국가 재정 범위에서 국회 논의를 거쳐 채택하고 동시에 취약계층에게 보건·교육·주거에 투자를 늘려가야 불평등에 따른 사회 양극화를 어느 정도 해결 할 수 있다. 분노·분열을 부추기는 정치는 배척에서 출발하며 파국과 혼란만 자초할 뿐이다. 공정과 정의도 중요하지만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포용과 통합이다. 시대정신은 이러한 철학을 가진 정치인을 요구한다. 정치력이 어느때 보다 절실해 보이는 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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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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