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2년 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몇 년 사이에 두 번 째로 구입한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이다. 이제 오히려 더 작은 곳으로 옮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도 막상 실천하지 못 하고 있다.
이유 중 하나는 독립해서 집을 떠난 두 애들이 휴가 차 집에 돌아왔을 때 어려서부터 자랐던 집이 그대로 있는 게 푸근한 느낌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이다. 큰 애는 두 살이 채 안 되어서부터, 그리고 작은 애는 그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러나 사실 그것 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집에 이사를 온 후 매년 늘어가기만 한 물건들을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무엇을 잘 버릴 줄 모른다. 처음 이민 왔던 고등학교 시절인 1974년부터 받았던 손편지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중고등부 학생회에서 발간한 잡지 창간호도 가지고 있다. 또한 대학교 졸업 때 어느 교회에서 보스톤 지역 한인 졸업생들을 위한 축하예배에 사용했던 순서지도 잘 모셔 두고 있다.
또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책들이 있다. 읽었던 것들도 있지만 언제 꼭 읽어야지 하고 다짐하고 책장에 그대로 꽂아 두고만 있는 책들도 상당수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꼈던 책들은 하얀색 종이 커버로 싸 놓기도 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가 언젠가 이사를 가려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줄여야 하고 이에 책들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최근에 나름대로 큰 결단을 내렸다. 일단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집과 오래된 바둑잡지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아마 아직도 백과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나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야 인터넷에서 손가락 하나로 클릭해 찾지 못할 정보가 거의 없지만 내가 이민 왔던 1970년대 그리고 아마 1980년 대만 해도 동포 사회 가정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당시 한인 이민자 부모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자식들의 보다 나은 교육과 장래를 위해 이민왔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제대로 공부하려면 백과사전이 꼭 필요하다는 세일즈맨의 호소에 설득을 안 당하는 부모들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집 부모들이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자녀들을 위해 한 질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부모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호텔, 학교, 가정집 청소 등의 투잡과 긴 오버타임 일을 마다치 않은 내 부모님도 30권으로 되어 있는 한 질을 구입했다.
그렇지만 사실 그 백과사전을 자주 사용하지는 못했다. 실제적으로 그 만큼의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 사전을 지금까지 나의 집 책장에 꽂아 두고 있었다. 허나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이 사전들을 이번에 정리하기로 했다. 기념사진만 한 장 찍어 두고 말이다. 그 사진은 나의 자식들에게도 잘 보관하라고 보내야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나를 있게 했고 그럼으로써 지금의 너희들도 있게 된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월간 바둑잡지들은 100권 가량 되니 제법 여러 해 동안 모았던 것들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한국 바둑계의 최고 어른이었던 조남철 국수가 바둑 보급을 위해 보스턴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나에게 통역을 부탁한다는 요청이 왔다. 내가 바둑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알려진 게 이유인 듯 했다. 그렇게 맺어진 조 국수와의 인연으로 한국기원이 월간지를 오랫동안 보내 주었다.
요즈음에는 바둑계 소식이나 기보들을 온라인으로 쉽게 접할 수 있어 별로 필요 없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바둑잡지가 바둑을 알리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이 잡지들도 이번에 한 권과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치우기로 했다.
이 책들 말고도 정리 할 것은 상당히 많다. 대상 물건들 하나 하나에 담겨있는 추억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인다고 추억들이 가슴에서 조차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과거에만 매여 있지 않기를 위해서라도, 가슴과 글 그리고 사진으로 묻어 두고 앞을 보고 나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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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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