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길게 드리운 숲 그림자가 영화사 뜰을 가득 메운다. 햇빛 가득하던 마당에 숲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면, 하루해가 또 무사히 지고 있음에 감사해진다. 해질녘 그림자는 한낮의 그것보다 훨씬 길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노년엔 그림자가 더 길다. 노년으로 접어든 영화사 초창기 멤버들의 그늘도 길어지고 있다. 다들 조금씩 몸이 고장나고 있다. 고장 나면 제일 먼저, 절엘 못 온다. 움직이지 못할, 그들의 노년을 위해, '스몰 빌리지'를 추진했었지만, 여러 상황상 접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길어지는 그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안타깝다. 안타깝지만, 올 것이 온 것뿐이다. 햇빛 가득한 인생의 황금기엔 그림자 따윈 보이지 않는 듯이 살아도, 인생이 질 때가 오면, 빛보다 그림자 쪽이 점점 더 길어짐을 봐야 한다. 나날이 길어지는 그림자의 실체를 모르면, 노후의 삶은 괴롭다. 그래서 직시해야 한다. 늙음이란 이름의 그림자, 신체기능의 낡음, 즉, 제일 먼저, 병이 온다는 것을. 늙는다는 것은 병이 든다와 같은 말이다. 누구나 아프다. 안 아픈 이도 있다고 하고 싶겠지만, 노쇠 그 자체가 병의 다른 이름이다. 노쇠 현상을 살펴본 적 있는지? 제일먼저 머리카락이 병들어, 흰머리가 난다. 눈이 침침해지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둔해지고, 소화. 배설, 신진대사가 안되고, 뼈마디가 아프고, 허리가 굽어지며, 행이 느려지고, 피부가 늘어지며, 사고력이 저하되고, 일상 유지가 힘들고, 숨이 차고, 고지혈, 심질환, 당뇨, 고혈압, 간경변, 캔서, 치매 등등등이 온다. 어디까지가 늙음이고, 어디부터 잘라 병의 시작이라고 할 것인가. 머리 흰 건 아직 병이 아닌가? 그럼 어디부터? 당뇨? 통틀어 그냥 흔한 노화의 현상들이다. 흰머리 돌릴 수 없듯, 늙음이란 병은 덜할 순 있어도, 낫진 않는다. 절대로 나을 수 없다. 왜? 늙어야 하고, 사라져야 하니까,다. 선망 조상들 다 그렇게 갔다. 모두가 당연히 여기며 산다. 근데 이것이 본인에게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왜 그런가? 왜 '나'는 늘 아니어야 하는가. 왜 남은 아파도 되고 '나'는 안되는가. 남의 입장에서 보면 '나'가 바로 남이다. '나'만 아닐 수가 없다. 물론, 발전하는 생명 과학에 의지해, 조금 더 오래 지탱할 순 있다. 그러나, 그래도, 세상이 뒤집어져도, 지지 않는 꽃은 없으며, 아무리 거대한 고목도 쓰러질 때가 온다. '제행무상이 생멸법' 이므로. 무상한데, 안 믿고, 영원에 올인하면, 병이 오면 괴롭다. 병을 모시고, 그 시중을 들며, 어제까지 멀쩡했던 하루가 환자의 것이 되어, 평범한 삶을 고통의 삶으로 바꾸게 된다. 소중한 노년의 삶이 질적으로 형편없어진다. 아프면 제일먼저, 늘 지겨워했던 일상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그 일상이 인생 다였음을 알게 된다. 저기 멀리, 뭐 있는 줄 알고 살았으나, 그 끝에 만난 게 노년임을 알게 된다. 그러기 전에,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것이다. 노년이든, 청년이든, 지금, 여기, 를 알고 누리는 게 최선이다. 모두 안 죽길 바라지만 그런 법은 없다. 저 불로초 찾아오라, 권세를 휘두르던 황제도, 역대 1등 부자들도 다 갔다. 저 우리의 위대한 스승, 서가모니 부처님도 가셨다. 황금만능 시대지만 자연의 운행 법칙을 멈추는 방법을 살 순 없다. 자연은 운행이 돼야 한다. 지고 펴야 하고, 흘러야 하고, 회전돼야 한다. 다 늙어도 '나'는 아니겠지, 평생 젊을 듯이 미래를 위해 살다가, 늙어 병들면, 억울하고 외롭고 슬프다. 그래서 마음공부가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안심을 위해 '무상'을 설파하셨다. '오온이 개공'이고 '불생이며 불멸' 인데 무엇으로 영원을 붙들어 맬 것인가. 무상을 깨쳐 안다고,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이 다른, 그 적요의 기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병이란 이름의 길고 긴 노년을, 극락정토에서 살게 되냐, 마냐의 얘기다. 극락과 지옥이 없다, 여겨지는 것은 가보지 않아서 그렇다. 가보면, 극락도 지옥도 바로 거기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도리를 깨쳐 알아, 세상 모든 노년의 삶이 병에만 올인하느라, 괴롭거나 슬프지 않고, 아름다운 노을을 보듯, 일상이 여여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동진 스님(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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