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첫 데이트에서 춤을 추러 가자고 했다. 청천벽력같은 제안이었다. 유학자 할아버지, 엄한 아버지 밑에서 ‘춤’이란 내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남자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참 어렵지만 춤으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결혼을 하여 사는 일은 두 사람이 각자의 몸을 버리고 제 3의 몸이 되어 춤을 추는 일이다. 운명의 춤 말이다.”라고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했다. 아들러는 지그몬트 프로이드의 문하생이었고 칼 융과 함께 당대의 3대 심리학자였다.
“Dancing” 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에 마음을 온통 빼았겼다. 한 미국 남자가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세계 방방곳곳에서 혼자 춤을 춘다. 아주 단순한 춤, 리듬에 맞추어 팔,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하는 춤이다.
뭄바이의 좁은 골목에서, 부탄의 가파른 절벽 불교 사원 앞에서, 오스트랄리아의 사막에서… 똑같은 춤을 춘다. 그가 추는 음악은 타고르의 키탄잘리 69번, ‘프란(Praan)’이라는 곡으로 뱅골어로 ‘삶의 조류’라는 뜻이다. “나의 혈관을 따라 밤낮없이 흐르고 있는 이 생명은 세계 속으로 흘러들면서 율동적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습니다 / 생명은 대지의 먼지 속을 지나면서, 무수한 풀잎으로 싹트거나 나뭇잎과 꽃들의 격렬한 파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 생명이 탄생과 죽음의 바다에 떠 있는 요람 속에서 조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 나의 몸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의 촉수에 의하여 영광스럽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피 속에서 춤추고 있는 여러 세대의 생명이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니체는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 믿는다’고 했다. 그는 저서 ‘짜라투스투라는 말했다’ 에서 “나의 덕은 춤추는 자의 덕이다. 무거운 것이 가볍게 되고, 모든 몸이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있어서 알파이자 오메가이다”라고 한다.
‘신은 죽었다’로 시작하여 기존의 철학을 다 ‘두들겨 부신’ ‘망치의 철학자’ 니체의 생애는 병으로 시작해서 병으로 끝났다. 어려서부터 두통, 복통,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정신상실자로 살다가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춤’이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얼마전 동양정신문화연구회의 노영찬 조지메이슨 대학 교수는 ‘군자의 즐거움과 일상성’이라는 강의에서 각 종교의 삶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셨다. 불교는 삶을 ‘고 (苦)’로 보고 기독교는 ‘죄’로 보고 유교는 ‘즐거움’을 삶의 목적으로 한다고 한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에서 보듯이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있게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을 말한다고 하신다.
댄싱(Dancing)의 후편에서는 그는 여러 사람과 같이 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방문하여 그곳의 주민들과 춤을 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청년들과, 마다가스마르에서 가방 맨 초등학생들과 발리섬에서 밸리 댄서들과, 도코의 한 식당에서 웨이트레스들과 평양에서 주민들과… 그런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천진한 환희에 넘친다. 세계의 모든 사람이 한 몸같다.
갑자기 도래춤 노래가 생각났다. “어리얼사 도래춤을/주렁주렁 출거나/이 세상도 처자들이 모두 손을 쥔달시면/넓은 바다 빙빙 돌며/도래춤도 출거외다/도래춤도 출 거외다/ 빙빙 빙빙 바다 돌며” 마치 이 평범한 미국 남자가 세계를 도래춤으로 주렁주렁 엮은 듯하다.
첫 데이트를 춤으로 시작한 우리는 결혼했고 아들러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버리고 제3의 몸이 되어 운명의 춤을 추어 오고 있는 셈이다. 니체의 말대로 삶을 가볍게 하여 새가 되어 날지 못 했고 오히려 삶의 중력에 눌리어 보낸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후두득 후두득 밤비가 창문을 때린다. 자연의 율동이다. 이 밤에 지구의 리듬에 맞추어 모든 생명체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율동을 느껴본다. 내 혈관속에서도 흐르는 생명의 율동, 세포속에서 영양분을 주고 받으며 움직이는 미생물들의 춤, ‘나’ 라는 생명체, 나를 춤 추게 하고 싶다.
나의 피 속에서 춤추고 있는 여러 세대를 내려오는 조상님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도래춤을 추고 싶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과 한몸이 되어 도래춤을 추고 싶다. 지구를 살리는 운명의 춤 말이다.
<
김은영 / 워싱턴 DC. 기후전문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