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이 쌓여 내가 된다는 말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매일을 열심히 산다고 자부 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없이 해야할 일 리스트를 지워나가며 매일을 살다보면 어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이번 달에는 어떤 책을 읽었으며, 새롭게 경험한 일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에, 매일을 기록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루틴 중의 하나이다.
나의 일기는 나라는 사람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되어 내가 가진 취향을 보여주는 한편, 나는 왜 어떤 일들에 더 열광하고, 어째서 특정한 생각들을 떨쳐낼 수 없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일기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불안장애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심리상담을 받았고, 많은 진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불편한 기억들은 불현듯 다가와 나를 마구 흔들어 힘들게 할 때가 있기에, 불안과 우울을 잘 다스리며 사는 것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그래서 내 일기에는 ‘불안’ ‘우울’ ‘마음’ ‘수련’ ‘돌봄’ 이란 단어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처음엔 그냥 외국인으로서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것이 불안을 유발하는 이유인 줄 알았더랬다. 수많은 자책들과 낮은 자존감으로 일상생활이 힘들어졌을 때, 심리학을 공부했던 배우자에게서 학교 보험을 통해 대학원생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상담을 권유받았다. 몇 번쯤 다녔을까? 나의 불안과 우울의 원인이 나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여러가지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건넸던 상담 선생님의 대답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은정, 트라우마의 얼굴과 본인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게 먼저 에요,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실제로 심리적인 문제를 껴안고 사는 많은 이들이 어린시절 보호자와의 건강하지 못한 상호작용을 경험했거나, 성장과 발달에 있어 중요한 욕구와 욕망들의 충족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결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어떤 이들은 상처를 잘 극복하고 살지만, 이런 결핍이나 치료가 덜 된 상처들은 가끔 괴물의 얼굴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 일어났던 범죄들 중,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몇몇(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의 가해자들을 생각해보자. 정인이 학대 및 사망 사건을 비롯하여 지면에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동학대 범죄들의 뒤에는 ‘미성숙’이라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그들의 부모가 있다. 조주빈 및 다른 범죄자들이 이끈 ‘n번방 사건’, 김태현의 세 모녀 살인 사건, 또 김영준의 ‘남성 n번방 사건’ 등의 성 착취 및 성폭력 범죄들은 놀라울 만큼의 치밀한 준비성과 실행력을 가진 이들이 공감능력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인지가 결여되었을 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 보여준다.
물론 이들에게 어떤 심리적 문제가 있던 그것이 범죄를 결코 정당화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현대사회에서 다 큰 성인이 자신의 상처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징징거린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은 또 누가 있겠냐며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다칠 수 있고, 우리 몸에 난 상처와 같이 치유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치유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얼만큼 가능한가이다. 특히나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정적인 한국에서는 심리상담의 문턱이 아직 높고 접근성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국에 사는 교민들에게도 언어, 문화적, 경제적인 문제로 심리상담을 하기 힘든 상황이 많을 것이다.
지난 1년여 팬데믹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위협이 되었던 시기를 보내온 지금,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에게, 그 전과 같이 계속해서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마음의 문제는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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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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