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의 귀재’이자 ‘현인’으로 불리는 워렌 버핏(90)은 자신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운 좋게도 미국에서 태어난 덕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제3세계 어느 빈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인생여정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성공 가능성과 성취의 정도는 현격히 낮아졌을 것이다. 운 좋게도 미국에서 백인남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그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나라에서 백인으로 태어나느냐 흑인으로 태어나느냐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같던 것이 미국의 역사이다. 운명의 신이 아기의 피부가 하야면 천국 바구니, 까마면 지옥 바구니에 담는다고 할 정도로 흑인의 삶의 조건은 가혹했다. 노예제도가 대표적이고, 노예해방 이후에도 근본적 변화는 없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00년 전 털사 인종대학살이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은 이후 40~50년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상유례가 없는 발전을 했다. 중산층이 늘고 경제력이 쑥쑥 커지면서 ‘블랙 월스트릿’이라 불리는 번창한 흑인커뮤니티가 전국 여럿 곳에 등장했다. 흑인차별이 당연시 되던 당시 백인들에게는 눈꼴 신 광경이었다.
여기에 팬데믹과 1차 대전 여파가 맞물리면서 1920년 전후 백인들의 심사는 불편했다. 스페인독감이 휩쓸면서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이 팽배하던 차에 1차 대전 참전 후 돌아온 백인들은 일자리가 없었다. 과거 그들의 일자리를 흑인과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적 불안에 인종적 편견이 겹쳐지면서 백인사회는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한편 유럽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근 40만 흑인 참전용사들은 인종테러와 구조적 인종차별이 여전한 것에 분노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며 대등한 대우를 경험한 그들은 정치행동에 돌입했다. 유색인종 지위향상협의회(NAACP) 등 흑인단체들이 주도한 민권운동의 시작이었다.
불안해진 백인들과 당당해진 흑인들이 대립하면서 사회분위기는 날로 살얼음판이 되었다. 1919년 여름 전국 30여개 도시에서 인종 테러사건들이 발생, 흑인 사상자가 수천명에 달하고 린치(사적 교수형)로 희생된 흑인이 100여명에 달했다. 유사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1921년 5월 31일 밤부터 6월 1일까지 벌어진 인종대학살은 그중에서도 잔혹했다. 경찰, 셰리프 등이 버젓이 참가한 백인폭도들이 흑인 거주지역인 그린우드 35개 블록을 일일이 돌며 약탈하고 불 지르고 죽이기를 18시간 동안 계속했다. 그도 모자라 전투기 6대가 동원돼 폭격까지 했다. 흑인 300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하거나 불구가 되고, 건물 1,200채가 파괴되면서 ‘블랙 월스트릿’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흑인청년이 백인 안내양을 건드렸다는 것이 이 엄청난 비극의 발단이었다.
털사 다운타운의 구두닦이였던 청년은 흑인용 공중화장실을 쓰려고 한 빌딩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안내양이 비명을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청년을 두들겨 팬 후 경찰에 넘겼고, 청년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들, 분노한 백인들이 총격전을 벌이면서 양측의 증오가 폭발, 결국 흑인동네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했다. 미 역사상 최악의 인종테러사건은 1997년 주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근 80년 묻혀있었다. 백인폭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교과서에 한줄 기록도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1년, 미국은 얼마나 변했는가. 지난달 31일 바이든 대통령은 털사 인종대학살 희생자 추모연설에서 미국에 엄존하는 인종테러의 깊은 뿌리를 인정하며 “우리의 법과 정책과 마음속으로부터 조직적 인종주의의 뿌리를 뽑도록” 최선을 다할 뜻을 밝혔다.
조직적 인종차별이란 유색인종에 대한 주거 및 취업차별, 교육과 사법제도 속 불평등을 말한다. 유색인종 거주지역을 제한하고 특정지역에만 저소득층 주거시설을 건설하면, 자연스럽게 흑인/히스패닉 하층민 지역이 형성된다. LA의 사우스 센추럴 같은 곳이다. 빈곤지역으로 굳어지면서 부동산 투자나 개발은 거의 없고, 교육시설 및 교육의 질은 떨어지고, 저소득층 지역이니 고용기회도 줄어들면서 범죄율과 수감률이 높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아동들은 하층민이 되는 지름길 속에 성장하고 빈곤은 대물림 된다. 조직적 인종주의의 결과이다.
법이 평등을 보장한다고 모두가 평등하게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법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누구나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소득층의 거주이전의 자유는 돈이 막고, 빈곤층 흑인/히스패닉 밀집지역은 주류문화로부터 단절돼있으니 사실상 인종분리이다. 제대로 교육받고 직장 잡아 번듯하게 살고 싶은 욕망, 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클 때 절도강도 등 범법행위는 끼어든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말하는 아노미 현상이다. 범법이 다수에 의해 반복되면서 흑인은 범법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낙인과 인종차별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년 전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관의 무릎에 목을 짓눌려 질식사한 사건은 미국 인종주의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털사 대학살 100년 후 미국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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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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