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에서 돌아온 후 거울 속에 빨려들어가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된 앨리스. 거대한 체스판을 본 앨리스는 붉은여왕에게 자신도 체스말이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붉은여왕은 체스판의 둘째 칸에서 출발해 여덟째 칸에 도착하면 여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며 앨리스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였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앨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붉은여왕에게 왜인지 물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미 다른 칸에 도착했어야 하는데요?” 그러자 붉은여왕이 대답했다. “그런 느림보 나라를 봤나! 여기서는, 보다시피, 계속 달려봐야 같은 자리야. 만약 어딘가 다른 곳에 다다르고 싶다면, 지금보다 최소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해!”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올해 미국생활 십년차에 접어든 나는 현재 페이스북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뼛속까지 인문학도였던 내가 실리콘밸리 테크회사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다행히 운칠기삼이란 말처럼 큰 행운들과 작은 노력들이 모여, 지난 십년간 구글, 아마존, 시스코, 페이스북 등 다양한 곳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언뜻 보면 커리어를 잘 이끌어온 듯 보이지만, 그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다. 인종, 성별, 언어 등 평등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분명한 마이너스 요인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왜 내가 이 일에 적임자인지, 나의 가치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미국 커리어 초창기에는 특히나 경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지만, 그 구멍을 메울 새도 없이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야만 했다.
이정도면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만큼 똑똑하고 나만큼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고, 심지어 특출나게 똑똑한데 특별히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내 부족한 안목에도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사람들은 눈에 띄었다. 그 누구도 경쟁을 부추기진 않았지만, 같은 출발선에 있던 사람들이 앞서 나가면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여왕이 열심히 달려도 제자리인 체스판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난 내 이마를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 체스말이 되어 살벌한 체스판 위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체스판에서 앞으로 한 칸 나아가기 위해서, 평균보다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저마다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나 자신은 이 체스판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말은 당연히 여왕(queen)이고, 가장 보잘 것 없는 말은 그저 앞으로 한 칸 씩 밖에 전진하지 못 하는 폰(pawn)이다. 둘째 칸에서 출발한 폰이 건너편 끝 여덟째 칸에 도착하려면, 무려 여섯 번이나 전진해야 한다. 내가 이 체스판 위 폰이라면 지난 십년간 그래도 꽤 열심히 살았으니 세번째 혹은 네번째 칸 쯤 왔으려나 싶다.
내가 스스로 한 두 칸 전진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경력이 쌓여서 라기보다는, 과거의 나는 나의 시행착오들을 부끄러워했고 숨기려 했다면, 지금의 나는 이를 받아들이고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내 경험을 아직 둘째 칸에 있을 사람들과 서스럼없이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스를 가끔 두면서도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쓰며 문득 둘째 칸에서 시작해 여덟째 칸에서 끝나는 폰의 여정이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이십 대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인생의 단 맛과 쓴 맛을 보기 시작하고, 팔십 대 전후로 일생을 정리하고 소천하게 된다.
붉은여왕이 알려준 ‘여덟째 칸에 도착하면 여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게임 규칙에 따라 폰이 퀸이라는 강력한 체스말로 전환됨을 얘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미생이었던 우리가 긴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내고, 인생의 종착점에 가까워져 ‘완생’이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다. 당장 내가 팔십 대까지 살지, 못 살지도 모르는 삼십 대의 나는, 일에 있어서는 똑똑하고 열정적인 인재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삶에 있어서는 마음이 따뜻하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한 칸 씩 앞으로 내딛을 때, 나 혼자 뒤처지지 않게, 나 또한 기꺼이 하나의 체스말이 되어 오늘도 열심히 나의 체스판 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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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정 페이스북 프로덕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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