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불륜도 막장도 아닌 그리고 머리를 써가며 시대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잔잔하고 느긋한 드라마를 보았다. 바로 박인환 씨가 주인공인 '나빌레라'라는 작품이다. 왜 박인환의 나이에 발레를 그토록 배우려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바로 알츠하이머였다는 실마리가 풀리면서 중반부로 넘어가고 있다. 특히 박인환이 매일 가지고 다니는 까만 수첩에 쓰여있는 한마디가 시청자를 깊이 울렸다. '나는 알츠하이머 입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명이 보편화 되기 전까지는 그저 치매 노인이 되면 정신줄을 놓고 미친 사람이 되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가끔 동네를 돌아다니는 미치광이를 본 적은 있지만, 집안의 수치로 여겨 밖으로 노출되는 걸 극도로 싫어해 집안에 숨겨놓고 그런 노인네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숨기는 집이 허다했다. 우리 엄마 또한 알츠하이머로 오랫동안 살아만 계시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나의 미래와 오버랩 되었다. 내가 70이 되었다. 약 20년 후의 내 자식들은 모두 자기의 일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전형적인 평범한 미국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천천히 하루의 일과를 이행한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었고 일어나자마자 여전히 모닝커피로 눈을 뜬다. 햇볕 드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침 신문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밝은 햇살이 들어오면 가만히 그 길이를 내 발등으로 재어본다. 창문 밖으로 내 나이만큼 자란 기다란 고목 나무에 어느새 새순이 나무 자락 끝마다 얼굴을 내밀어 인사한다. 하나씩 보면 보이지도 않는데 저마다 손짓하니 둥그스레 처녀 젓 몽우리처럼 부끄럽게 솟아있다. 벌써 봄이 왔나 보다.
하지만, 70번째 맞이하는 새봄인데 만날 때마다 이리 부끄러우니 이제 몇 번 남지도 않을 봄이련만 언제 익숙한 모습으로 인사할지 모르겠다. 파랑새를 흥얼거리시며 저 파란 하늘로 가버리신 나의 할머니여, 하얀 가루가 되어 저 제주 바다에 뿌려져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 나의 언니여! 당신들을 만나러 갈 때쯤에나 이 찬란한 봄이 익숙해지려나 싶다.
나는 내 엄마가 치매가 시작된 나이가 되었다. 하나둘 기억해야 할 것들이 줄어들 나이가 되었지만, 꼭 필요한 기억은 늘어만 나는듯하다. 서서히 기억이 지워질 거라는 충고를 의사에게 들어서 너무 슬픈 날이었던 기억도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나누었던 치매에 걸리면 안락사하고 싶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아들에게 전화로 확인해 놓은 참이다.
엄마가 조금씩 기억이 지워져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엄마를 부디 저세상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아들은 울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세포의 70%가 없어지는 그 지점에 안락사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끔 내 주치의에게 조치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박인환이다. 박인환이 울며 혼잣말을 한다. ‘엄마! 나 어떡해요, 점점 기억이 없어지고 있어요...’ 나의 기억 세포에 불멸은 없을 터, 언젠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기억이 도망을 가지 않으려나 싶은 게 지금도 안면 기억장애를 앓고 있고 건망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할 정도로 심각하다. 더군다나 가족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면 내 엄마의 피로 인해 나의 치매 증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임을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나의 기억을 죽을 때까지 꽉 붙들고 산다는 건 이미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아무리 몹쓸 병에 걸린단 해도 치매는 피하고 싶다고 한다. 정신이 밖으로 나가 있는 상태에서 숨을 쉬며 인생을 연명한다면 숨 쉬지 않고 그냥 이 세상과 이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머리는 온전하지만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당연히 지각 있는 행동으로 사고할 수 있어서 감히 생과 사를 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치매처럼 정신세계가 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나는 70이 된 우리 엄마의 얼굴이다. 아침 햇살의 따뜻한 온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설레는 하루를 만나며 글을 쓴다. 치매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하루해가 넘어가고 있는 저 능선의 해 길이만큼은 아니리라. 저 붉고 건강한 해가 보이지 않은 저세상으로 넘어가는 그런 날,
나의 기억도 해와 함께 넘어가리라. 아직은 나의 생이 나의 기억을 붙잡고 싶나 보다. 박인환처럼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저 해의 끝을 맴돌며 나의 기억을 지워나가면 그뿐이다. 안녕 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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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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