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철우 목사가 만난 ‘애국지사 후손들’ ⑧ 이용설(1895.10.12.~1993.3.8) 애국지사와 손자 이원규
이용설 애국지사
▶ 뉴욕한인교회 건물 구입 종잣돈 모금 주요 역할
▶ 함태영·이갑성 등과 세브란스 의대 3.1운동 주도
▶ 시카고 유학당시 도산의 권유로 흥사단 입단
▶ 손자 이원규, 심장수술 권위자로 병원엔 환자들 북적
▶ 할아버지 유언 받들어 사회봉사 앞장
1921년 3.1절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계기로 그해 4월 18일 창립한 뉴욕한인교회는 맨하탄 매디슨 감리교회(23가와 매디슨)의 배려로 예배를 2년간 드렸다. 그후 감리교 재단의 재정후원으로 자체건물(4층 아파트,439 w. 21 st.)을 마련하고 4년이 지나 교회 확장을 위해 11인의 모금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중 이용설은 현재 위치의 교회 건물 구입에 종잣돈이 된 4,000달러 모금에 주요 역할을 한 인물이다. 훗날 보건후생부장(현 보건복지부 장관), 세브란스 병원장, 대한병원협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독립투사, 사회운동가, 의료행정가로 활약했다.
■이용설 애국지사
이용설은 평북 희천에서 태어났다. (1895.10.12) 아버지 이재후,어머니 최재선은 원래 평양에서 고위관직(총순-현 경찰서장급)에 있었으나 청일전쟁(1894~1895)으로 희천으로 피난을 갔었다.
이곳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자란 이용설은 평양에서 70리 떨어진 외서창이라는 곳에서 서당에 나가 한문을 터득했고 13세 때 논어, 맹자를 읽었다. 1907년 외서창에 세워진 교회(1905년)에서 스왈른 선교사가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용설의 온 가족이 교회를 나가게 됐다. 후에 그의 부모는 초대장로와 권찰이 됐다.
당시 조혼이 성행하던 때라 외아들이었던 이용설도 12세 때 16세의 아내를 맞았다. 1년후 신학문을 공부하러 평양으로 갔다. 외할머니집에 있으면서 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을 다녔다. 그때 동창으로 조병옥,장리욱,박재성 등 애국운동에 참가한 친구들이 많았다.
숭실전문 졸업후 선생이었던 모우리 선교사와 세브란스 에비슨 교장의 도움으로 곧 세브란스 의대에 진학했다. 1915년 그의 나이 20세때다. 이용설은 80여년 가깝게 남대문 교회 장로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세브란스 의대 졸업 한 달을 앞두고 3.1 운동이 터졌다.
3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던 여천 이용설은 학생의 중심인물이었다. 당시 남대문 교회 전도사로 학교 구내에 살던 함태영(이승만 정권때 부통령 역임)과 약제실 책임자 이갑성(33인중 가장 젊은대표) 두 사람은 독립만세 시위를 여천에게 알리고 학생동원의 책임을 맡겼다.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진 날 서울장안은 온통 태극기 물결이었다.
학생들은 이어 3월 5일 남대문에서 시위를 갖기로 하여 강기덕(고대). 김원벽(연희) 중심으로 1차 시위를 시민과 더불어 성공리에 마쳤다. 2차 시위는 여천이 주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고 주모자들이 일경에 거의 붙잡혔다. 더욱이 독립선언문과 태극기가 세브란스 구내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탄로가 나 학교구내를 순사들이 수색에 나섰다.
혼자 학교구내 숙소에 있던 여천은 뒷 창문으로 빠져나와 약국 창고에 짚더미를 뒤집어쓰고 숨었다. 순사들은 창고까지 수색했으나 여천을 찾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 저를 살려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실은 여천의 책임으로 학교 신문을 발간했는데 불온문서라고 규정한 일경은 그 출처와 주모자 색출에 나서 더 이상 학교 구내에 머물 수 없었던 그는 드디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북경에 도착한 여천은 미국의 라커펠러재단이 경영하는 협화의과대학에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이어 레지던트로 들어가면서 외과를 택하게 됐다. 마침 상해 임정을 돌보던 도산 안창호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 존경하던 도산을 만났다. 여천은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을 생각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을 고백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산은 “군은 지금 훌륭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네, 달리 무슨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말인가, 한국민족 각자가 자기 능력과 처한 위치에서 자기분수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독립운동이 아니겠는가. 일본인을 능가하는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이 최선의 독립운동“이라면서 격려해 주던 도산의 말씀을 평생 간직하며 살게 됐다.
여천은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유학할 때 다시 만난 도산의 권유로 1925년 흥사단에 입단하게 됐다.
여천은 20대 때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 평생을 학교를 위해 살면서 이사장, 학장으로 세브란스의 현대식 건물을 완성했고, 평생 신앙생활을 하던 남대문교회 10년 넘는 건축위원장을 맡아 현대식 석조 예배당을 완공했다.
또한 오랫동안 YMCA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된 YMCA 건물을 새로 완공했고 건축위원장을 맡아 현재 대학로의 도산회관을 신축했다. 그의 별명은 황소다. 진실한 황소였다.
군정(1945~1948)때 여천은 후생부장(현 보사부 장관)으로 의료행정과 국민보건에 기초를 놓았고 월남동포들을 위해 보광동 공동묘지를 개간해 전재민주택 100여 채를 지었다.
흥사단 서무를 담당했던 필자의 부친도 불하를 받아 보광동1번지에 집주소를 갖게 된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948년 여천은 제헌 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에 초석을 놓았다.
오늘 뉴욕한인교회 완공을 앞두고 여천의 4,000달러 모금 제안이 실마리가 되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원규·장화인 부부와 가족들.
■손자 이원규
필자는 여천의 주례로 흥사단에 입단했고 그분이 강론을 하면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그때 그 옆에는 항상 손자인 이원규가 있었다. 1989년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왔을 때 이원규·장화인 부부를 만났다. 마치 여천 선생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 후로 30년 이상을 가깝게 지내 오고 있다.
이들 부부는 YMCA,YWCA, 학생회장으로 196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학생대회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70년 결혼하게 됐다.
이원규는 1971년 1살된 아들과 같이 도미해 뉴욕에서 인턴과정과 의사자격시험을 거처 팀 리건 박사밑에서 심장전문의로 훈련을 받고 심장 전문의가 됐다. 한때는 릿지우드 밸리병원 심장내과 과장을 역임했고 뉴저지 심장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심장수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뉴저지 오클랜드 개인병원은 항상 환자들로 넘쳐난다. 이들 부부는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고 최상의 가치를 높이고자 열사람의 몫을 해낸다.
교회 장로와 YMCA 이사장, 모교모금후원자로 최선을 다한 이원규는 120년 된 뉴욕신학대학 이사장으로 10여년만에 안정된 재정기반을 다시 세우는 기적을 일으켰다. 정일형,김마리아,명신홍,현영학,주선애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사회봉사에 언제나 앞장서고 있다. 아내인 장화인은 AWCA(뉴저지 여성사회봉사센터) 창설자이며 모교 프린스턴 신학교 한인동창회장과 드류대학교 재단이사, 이화국제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장화인의 어머니는 견훤의 34대 후손으로 믿음으로 온 생을 바친 믿음의 어머니였다.
여천의 신앙과 애국, 장화인 어머니의 신앙이 그대로 이어져 이들 부부의 삶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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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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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에 큰 족적이 있는 분이지만 반일운동 면에서는 안타깝지만 일제 말년에 친일단체에서 적극 활동하는 등 변절한 것으로 자료가 발굴되고 연구가 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친일사전에도 등재가 돼는 인물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