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칼럼 ‘3.1 독립선언과 일본의 본색’이 나가자 여러분의 조언과 격려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 민족 말살시도(절멸)는 추상적 표현이 아니다. 일본은 고종황제가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밀사로 보낸 것을 트집 잡아 그를 강제 폐위시켰다. 내시 2명을 매수, 대역으로 앉히고 조선 주재 각국 외교관들 앞에서 순종에게 양위하는 쇼를 벌인 것이다.
그 후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각각 일본인과 강제 혼인시켜 이씨 왕조의 상징적 적통을 끊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동조동근(일선동조), 창씨개명 등으로 집요하게 조선민족의 존재를 지우는데 부심했다.
한편 왜구들은 만주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훼손,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던 것처럼 황당한 날조를 했고, ‘임나본부설’을 주장하며 가야국 일대를 자신들이 지배했었다고 역사조작극도 벌였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고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그보다 더 천인공노할 만행은 조선인의 말과 글을 금지 소멸시키고자 광분했던 점이다.
모든 학교와 관공서, 공문서, 공식 회합에서 일체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길 경우 비록 어린 학생일지라도 교장 등 앞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는 등 불이익 수난을 당했다. 왜구들은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려던 ‘조선어학회’가 항일운동을 한다며 지도자 주시경, 박은식, 최현배 등 수많은 인사들을 투옥 고문하고 ‘우리말 큰사전’ 원본을 압수해 갔다.
그들은 또 우리 민족의 좌우익 두 세력이 ‘하나의 민족’을 슬로건으로 내건 ‘신간회’가 급속도로 조직을 확장해가자 안재홍, 유억겸, 백관수, 조병옥 등 다수의 주동인물들을 투옥, 고문 탄압하였다.
심지어 왜구는 우리 민족의 꽃 ‘무궁화’까지도 전국을 파헤쳐 멸종시켜려 한 사실도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자마자 수많은 서원과 서당을 폐기시키거나 불살라 놓고 학교를 지어 주었다고 생색을 내고 있다. 그들이 세운 것은 식민지 엘리트나 좀 심하게 말하면 앞잡이를 키워내기 위해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전신) 등 각 도시에 공립학교, 사범학교를 설립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도 유교 재단의 성균관대학을 비롯 고려대, 동국대, 연세대, 세브란스 의대 그리고 보성고, 중동고, 양정고, 휘문고, 배재고, 경신고, 숙명, 창덕, 배화 등등 민족자본과 왕실재단 미션계통의 교육기관이 저마다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교육의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또한 문화예술 분야는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일본이 오히려 우리에게서 배워갔다. 그들이 우리를 가르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철도는 미국 선교사들이 건설한 경인선이 최초이며 전차 역시 미국인 손으로 서울에서 일본 동경보다 3년 앞서 운행하기 시작했다. 경부선, 경원선은 저들이 만주, 중국 쪽으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그리고 온갖 재원을 일본으로 빼내가기 위해 건설한 것이지 조선을 위해 건설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까지도 일본은 과거를 부정하며 철저히 반성이나 사죄 없이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들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점점 더 잃고 있다. 악마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승자의 의연함을 보이고 있는가. 아직도 우리는 ‘친일 인명사전’이라는 것을 내흔들며 식민시절 부역했던 인사들을 마구 공격하고 있다.
긴 세월을 식민, 지배, 협박, 회유 아래 누군가 ‘을사오적’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손기정, 남승용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불가항력, 불가피성을 민족애로서 수긍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도리일지도 모른다. 안익태 선생의 예술성을 살려야지 그가 만든 현존 애국가를 없애라니…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 ‘푸르른 날’ 등 아름다운 시들이 사장되어 가니 참으로 안스럽다.
일제가 패망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시절 살아남았던 사람들 모두 ‘반동’으로 응징하려는 것이야말로 민족분열주의로 반박할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일본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인은 분열이 심하다며 “100년 후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악담, 협박을 하고 떠났다. 일본 감옥에서 병사한 저항시인 윤동주에게 친구 정지용 시인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다”고 늘 위로했다고 한다.(원로 영문학자 변만식 선생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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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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