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 전 기고에서 월탄 박종화 선생의 장편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할까 한다. 월탄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역사 소설의 대가인데 그 문장이 평이하고 술술 넘어가서 읽기에 매우 편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중학교 때 그 장편 소설을 단숨에 읽고 장래에 역사를 전공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굳혔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는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충신 백사 이항복이 귀양을 가다가 철령 높은 곳에서 한양을 향해 임을 그리며 쓴 시조인데 월탄의 이 역사소설은 이항복의 시조에서 제목을 따온 듯하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의 주인공은 이항복이 아니라 따로 있다. 당대의 재상이요 고전 문학에서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쓴 문인으로 더 알려진 송강 정철과 그의 인품을 사모하는 강아라는 아리따운 기생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데 성정이 올 곧은 송강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가 강계로 귀양을 가고 강아는 그 험한 강계까지 따라가서 수발을 든다. 기생이면서도 절개를 지키며 한 선비를 사모하는 모습이 어린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강아는 먼발치에서 사모하는 임을 눈으로 맞으며 저녁밥을 짓는다. 벽촌에 귀양살이 하는 처지라 거친 잡곡밥과 산나물이 전부였으나 송강의 눈에는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더구나 임이 있고 거문고가 있으니 비록 죄인의 신분에 술잔은 없어도 안빈낙도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 줄을 탄다. 강아 또한 청아한 모습으로 화답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그때 나는 한창 바둑을 배울 때라 그 모습이 얼마나 좋던지 나도 저렇게 일생을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바둑판 하나 메고 돗자리 하나 들고 시원한 계곡에 자리를 깔고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바둑 한 수 청하고 국화주 한 잔 마시며 인생을 논하면 얼마나 좋을까?
송강과 강아가 주인공임은 분명한데 정작 소설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은 가희라는 상궁이었다. 그녀 또한 절세의 미녀로 상궁 신분으로 왕후를 비롯하여 후궁이 여럿인 궁궐에서 왕의 총애를 받고 궐내 실세가 되어 내명부를 쥐락펴락하고 조정에도 관여한다. 기생 강아는 가상 인물인데 반해 이 여인은 찾아보니 실제 인물이었다. 광해군 시대까지 이어지는 궁궐 내 여인들의 암투와 사색당파로 편할 날 없는 조정에서 정권을 잡으려는 중신들의 사생결단의 싸움, 그러면서도 임금과 나라를 향한 충성을 다하는 충직한 인물들의 생생한 면모를 보며 나는 조선 역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탄식하다 웃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하며 그 소설을 읽었다. 나중에 조선 왕조 오백년이라는 드라마를 시대를 나누어 연속극으로 오래 방영했지만 생생하게 화면으로 보는 재미는 있었으나 어릴 적 책으로 읽던 그 깊은 감동을 따를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광해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었다. 연산군, 광해군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조, 종 같은 묘호를 쓰지 못하고 후궁에게서 난 왕자들에게나 주던 군이라는 묘호를 얻었으나 그 소설에서는 몇 가지 잘못은 있어도 나라의 정치만큼은 잘한 임금으로 묘사된 것이다. 후에 국사를 전공하고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니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몇 안 되는 외교와 내치의 천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초기 광해군 시절에는 탕평책을 써서 사색당파를 없애고 이항복, 이원익 같은 충신들을 기용해서 임진왜란 후의 나라의 기틀을 회복했고 당시 일어나는 여진족의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로 나라를 지켜낸 조선 시대에서 몇 안 되는 평가받을 군주였다. 그러나 만년에 조카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서모 인목대비를 폐서인함으로 반정이 일어나 패역의 군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당대와 달리 역사의 평가는 후에 진실로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 각 사람의 삶도 죽은 후에 제대로 평가될 것이다. 더구나 나는 목회를 하는 목사이기에 나의 사후에 하나님의 평가가 어떨까 의식된다. 더구나 우리는 영생을 믿고 내세를 믿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소망한다. 나는 역사에 이름 남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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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구 목사 (성령의 비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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