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레이스가 한창이다. 코로나19 시국이 아니라면 극장에서 벼락치기로 영화를 관람하며 감독과의 대화를 찾아 다녔을 시기인데 올해는 방구석 1열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있다. 극장용으로 찍은 영화를 크지 않은 화면에서 보자니 놓치는 장면들이 많고 주위의 훼방으로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을 빼면 나쁘지는 않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이 꽤 있어 중간중간 정지시켜 미국 정치사를 검색할 틈을 만드는 것은 보너스다.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 아카데미상 유력 후보작 3편을 뽑아봤다. 넷플릭스 개봉 영화 ‘맹크’(Mank)와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The Trial of the Chicago 7), 그리고 12일 개봉하는 ‘미나리’(Minari)이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Da 5 블러드’(Da 5 Blood)가 재밌었는데 ‘유다와 블랙 메시아’(Judas and the Black Messiah)를 보지 못해 보류했고 기대작 ‘노마드랜드’(Nomadland) 역시 개봉 전이라 포함시키지 못했다.
먼저 애론 소킨 감독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닉슨 정부 시절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시카고 7인의 재판 과정을 다룬 법정 드라마다.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평화롭게 시작했던 반전 시위가 경찰 및 주방위군과 대치하는 폭력 시위로 변하면서 주동자 7명이 기소됐던 악명 높은 재판을 다룬다. 베트남 파병을 강행하는 민주당 경선 후보와 당원들의 분열, 반전 세력의 첨예한 대립까지 미국 정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다. 2만여명의 미군 전사자를 낸 베트남전의 실체가 알려지면서 반전운동은 격화되고, 폭력 선동 혐의로 법정에 선 이들에게는 흑인운동가들의 표현권을 제한하는 ‘랩 브라운 법’을 적용해 무리한 기소가 요구된다. 당시 반전운동은 흑인민권운동과 함께 벌어졌는데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겹쳐지면서 시위 없이 정치·사회적 변화는 없음을 다시 깨닫게 한다. 시대상을 고려해 각본을 쓰진 않았는데 만들고 보니 각본처럼 시대가 퇴화했다는 소킨 감독의 언급처럼 지난해 내내 보았던 경찰과 충돌하는 시위대 영상이 진짜 1968년 그 당시와 똑같다.
관객과 영화기자들의 평이 엇갈리는 흑백영화 ‘맹크’는 각본가 허먼 맹키위츠로 분한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일품이다. 1929년 주가 대폭락이 발화시킨 경제 대공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할리웃 영화산업을 다룬 작품이다. 80년이 지나서도 영화학도들이 최고로 꼽는 영화 ‘시민 케인’의 탄생 과정이 맹크라 불리는 각본가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MGM 창업주 루이스 메이어 회장의 위선은 실직자가 대량 양산된 현 시국과 맞물려 울분을 터뜨리게 한다. “국가의 경제위기로 회사의 사정이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은 영화를 볼 여유가 없으니 가족 여러분에게 임금 삭감이라는 어려운 부탁을 드린다”라고 눈물을 짜내며 직원들을 가족 테두리에 넣어 고통 분담을 요구해 비용절감을 얻어내지만 정작 그는 미디어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어울리며 여전히 호의호식한다. 부자들의 호화스러운 삶이 유지되는 걸 지켜본 맹크가 이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껴 완성한 각본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시민 케인’이다.
그리고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영화 ‘미나리’다. 물만 있으면 어디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를 이민자 가족의 모습으로 비유하며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민온 한인 부부의 아메리칸 드림을 담아낸다. ‘낯선 미국의 평범한 한인 가족, 그들이 만든 눈부신 순간들’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한줄평 그대로다. 은은한 달빛 아래 흑인의 모습을 푸르르게 표현해 라라랜드를 누르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를 닮았다고 할까. 이 영화로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상 여우 조연상 후보에 오를 거라는 기대감이 큰지라 극장이 문을 닫아 미국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 볼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루 종일 병아리의 엉덩이만 들여다보다가 농장을 갖게 된 젊은 아버지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븐 연, 아내 모니카로 나온 한예리, 윤여정이 열연한 외할머니와 티격태격하는 장난꾸러기 아들 앨런 김, 이민 1세대 부모를 둔 자녀가 감당해야할 책임감을 눈빛으로 표현한 딸 노엘 케이트의 앙상블 연기는 보는 내내 따뜻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이 만들어낸 미국이라는 광활한 대자연 속 이들의 삶이 서정시 같고 미나리의 강한 생명력이 이민자들의 회복 탄력성을 상징하며 우리 스스로에게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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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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