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한국일보 미주문예 공모전 수필부문 가작 입선작
어찌어찌 하다 보니 앞으로 남은 시간이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보다 짧은 것이 확실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옛일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그러다보니 미안한 일들이 자주 생각나고,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사과가 많다.
땅강아지야 미안하다. 학교 운동장에서 너를 발견하고는 네가 도망가지 못하게 자꾸만 앞을 막았었지. 워낙 장난감이 없었던 60년대이다 보니 내게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꼬물꼬물 도망갈 생각밖에 없는 너를 그렇게 괴롭히며 놀았다.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고생을 했다. 미안하다. 사과한다.
벌아, 미안하다. 네 꼬리에 있는 침으로 나를 쏠까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어서 너를 기절시켰지. 꽃에 앉아 있던 너를 고무신의 코 부분에 낚아채어 가둔 다음 손에 들고 어깨를 축으로 팔을 프로펠러처럼 힘껏 빙글빙글 돌려서 너를 기절시켰다. 고무신 안에서 얼마나 어지러웠니. 미안하다. 사과한다.
풍뎅이, 네게는 좀 많이 미안하다. 어쩌다 너를 잡으면 손목시계 태엽 감듯이 목을 몇 바퀴 비틀어 돌린 후 뒤집어 놓고 네 몸 옆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돌아라, 돌아라, 빙빙 돌아라.”하고 주문 외우듯이 말했다. 그러면 너는 날개를 움직이기는 해도 날아가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았지. 살아있는 생명의 목을 몇 바퀴 비틀어 놓고서 그 무슨 잔혹한 놀이였단 말이냐.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사과한다.
잠자리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네가 암놈이면 다리에 실을 묶은 후 공중에 띄워서 너랑 짝짓기하러 온 수놈을 잡는데 썼다. 그러다 그 놀이가 시들해지면 네 꽁무니에 강아지풀 대를 꽂아서 하늘로 띄워 올렸지. 강아지풀 무게 때문에 멀리 날지 못하고 너는 땅에 떨어졌다. 미안하다. 사과한다. 그리고 여름방학 숙제에 들어있는 곤충채집 때문에 매년 여름이면 너를 잡아야 했던 나를 용서해 다오. 너를 붙잡아서 방부제를 주사한 나를 용서해 다오. 무슨 그런 방학숙제가 다 있었는지…
메뚜기에게도 미안하다. 너희들을 잡아서는 강아지풀 줄기로 목 뒤를 꿰어서 집으로 돌아와 불에 구워 먹었지. 꼬마들에게 환영 받는 먹거리였다. 게다가 너희는 식량증산을 방해하는 해충으로 취급되었기에 생명을 해친다는 일말의 죄의식조차 없었다. 미안하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빈한한 시절에 있었던 일이니까 메뚜기 네가 나를 이해해 다오. 미안하다.
개구리, 네게도 용서를 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다리를 가늘게 떨던 네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동네에 병약한 형이 있었고 그 형 엄마에게 개구리 다리를 갖다 주면 동전을 얻을 수 있었기에 여름날에는 떼로 몰려다니며 너를 잡으러 다녔다. 그 형네 엄마는 다리만 받았기에 쓰러진 너를 눕혀 놓고 고무신으로 네 상반신을 밟은 후 다리를 잡아당겨야 했다. 그 형의 건강회복을 위해 그리고 내게 생기는 동전 때문에 희생당한 네게 많이 미안하다. 너 때문에 그 형이 기력을 회복했는지 어땠는지 기억은 없지만 부디 그 형이 건강했기를 바란다.
뱀, 미안하다. 너는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닌데,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로 그리고 어쩌면 나를 물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막대기로 너를 두들겨 팼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게 네 잘못은 아닌데 내 가슴속 공포의 반작용으로 네게 그런 폭력을 행사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가시려 했던 법조인의 길, 그러나 삼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했기에 시험을 목전에 두고 포기하셔야 했지요. 같이 공부하던, 자신보다 한 수 아래 실력의 친구가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었을 때 아버지 당신께서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셨겠지요. 그래서 슬하의 여섯 자식 중 하나쯤 그 꿈을 이루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셨고요.
국민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우등상장을 받아온 둘째아들. 2학년 때 서울로 보냈더니 매달 치르는 월말고사에서 어지간하면 90점을 넘어 거의 매달 상장을 받아오던 둘째아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 때마다 뭔가 상장 하나씩 받아오던 둘째 아들. 법학과에 들어가서 3학년과 4학년 때 사립대학교 등록금에 맞먹는 장학금을 받아온 둘째아들. 기대가 많으셨을 텐데 그 꿈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 못난이, 둘째아들. 그 실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제가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학교 졸업 후 회사를 다니면서 ‘아…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나를 공부시키셨던 것이구나… 세상에나… 그래… 그 때 더 열심히 했었어야 하는 거였어……’하고 생각했으니 저는 무척 늦게 철이 드는 편입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가신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이 아들의 사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언제고 저도 아버지 먼저 가신 길을 뒤따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뵙게 되면 그 때 또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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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 <스프링필드,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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