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종업원 후아나(Juana) 씨의 포상식.
아내의 아름다운 목 시계.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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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탁업에 뛰어든 사연
단일 업종으로 최다인 세탁업을 하는 한인 중 어느 누구도 미국 가서 세탁소를 해야지 하는 야망으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세탁협회장을 역임하며 만나본 수많은 세탁인들의 삶은 다양했고 나 역시 먹고 살기 위해 뛰어든 업종이지 다른 아무 이유가 없었다. 준비 없이 시작한 세탁업에서 전국 탑 1% 매출을 자랑하기까지 여러 사연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하겠다.
# 부활은 현세의 기적
왜 새해 종은 칠흑 속 12시에 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든 부활의 시작에는 암흑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시간과 과정의 경과를 거쳐야 염원의 빛이 보인다는 진리가 있다. 나의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한 후 신에게 바친 수많은 기도는 나를 위한 이기적 탄원에 불과했고 미래의 빛은 존재치 않았다.
한번 빠져든 동굴은 어둠의 늪이었다. 밤잠을 설치며 이 밤이 마지막 밤이기를 기원하던 날들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이 떠지면 또 다른 악몽이었다. 그 아침들이 나에게 새로운 부활의 날들임을 깨우쳐 준 것은 그 악몽에서 깨어난 후였다.
매일 같은 꿈을 꿀 수 없듯이 우리는 매일 같은 삶을 살수 없고 살아서도 안 된다. 부활은 죽어서 이루는 것이 아닌 현세에 이루어야 하는 기적이다. 나는 그 기적을 이루었다.
# 4개월 만에 달라진 세상
1999년 초봄 교도소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시외버스(Greyhound)에 홀로 올라탄 나는 숨은 쉬고 있었으나 죽은 목숨과도 같았다. 경찰 간부직을 천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다른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전과자라는 주홍 글씨만 남았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정의와 법치는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식구들 볼 면목도 없었다. 꼿꼿했던 자존심은 땅에 떨어져 발에 밟히고 무엇이든 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초초함만이 어깨를 짓눌렀다.
벽면 가득 장식했던 수많은 상패들을 하나씩 걷어내서 박스에 담는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떤 직장을 무슨 사업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목이 메고 답답했다. 상관이었던 헤네시 변호사(Captain Hennessy—살인과 과장 후에 메릴랜드 판사)로부터 개인 탐정으로 일해보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도저히 그 일에 발을 담을 수 없었다.
탐정이란 직업이 경찰과 법원을 오가는 직업인데 내 과거를 회상시키는 것은 고문과 같았다. 과거와의 끈을 단절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과거에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을 혼자 읊조리며 다녔다.
# 패자 부활전-Atlanta
새 출발을 해보자는 생각에 막연히 조지아 애틀랜타로 운전해 가보았다. 그때 상대적으로 물가와 임대료가 저렴한 애틀랜타가 떴다. ‘모나리자’ 라는 커피숍에 앉아있으니 부동산 업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요즘 뉴욕 하고 워싱턴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덕 좀 보냐?” 맞은편 사람이 혀를 찼다. “여기 패자 부활전이야, 돈 가지고 내려와야 하는데 깡통들 천지야….” 대화를 듣던 나는 자리를 떠야 했다.
# 돈 이야기-비굴함과 용기
모든 남자들이 경멸하는 이가 비굴한 남자다. 그러나 비굴함도 용기의 일종이다. 아무나 머리 숙여 돈을 빌리고 마음 없는 소리하며 억지 춘향 하는 것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업을 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세탁소가 돈 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던 시기였지만 수중에 잘돼는 세탁소를 살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세탁소 공장을 직접 차리기로 마음먹고 공장 부지를 찾기 위해 지도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 이 잡듯 돌아다녔다. 교통이 혼잡한 시간을 피해 한밤중에 차를 몰고 다니며 임대 사인이 보이면 종이에 적고 전화 걸어 메시지를 남겼다.
수천 통의 전화연락 끝에 우드브리지의 한 장소가 어렵게 선택되었다. 그런데 거금의 기계와 설치비용이 필요했다. 종이 위에 종자돈을 빌려줄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 보았지만 몇 명이 안됐다. 오랜 친구를 어렵게 찻집으로 불러내서 마주 않았지만 차마 돈 이야기가 목구멍에서 안 나왔다.
쓸데없는 잡담 끝에 친구가 떠나고 식은 커피 잔 속에 비쳐진 내 얼굴을 보며 ‘어쩌다’ 하는 말만 수없이 자문했다. 세탁 장비 파는 Frank(District Cleaners Supply)는 청사진 도면을 보이며 돈 문제를 거론했고 돈이 없다고 말하자 융자회사를 소개시켜 주었다.
# 목에 건 올가미
GM 계열 차를 구입하면 GMAC에서 차 융자를 해주듯이 Forenta라는 세탁장비 회사에서 장비 융자를 해주었다. 장비 팔아 남기고 수년간 고 이자까지 챙기니 땅 짚고 수영하는 구조였다.
융자 담당자가 크레딧 점수가 좋아 융자 가능하지만 두 명의 보증인(Cosigner)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식구 외에는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국회 의사당 근처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여동생에게 달려갔다. 여동생과 매제는 한참을 뜸들이더니 사업 계획서(Business Plan)를 가지고 오라며 냉정하게 퇴짜를 놨다.
융자회사에서 온 서류를 팔꿈치에 꼽고 여동생 가게 문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내 머리를 쳤다. 10년 전 그 여동생 가게는 부수입을 위해 마련했던 내 가게였다. 은퇴하는 유태인에게서 구입했고 야간근무를 하던 나는 근무가 끝나는 아침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종업원과 같이 그 세탁소를 운영했었다. 장사는 잘됐지만 어머니가 직장 다니던 여동생에게 팔라고 졸랐고 조건 없이 여동생에게 넘겼던 가게가 바로 그 가게였다.
# 여동생에게 퇴짜맞고 달려간 테네시
사실 무척 섭섭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여동생이 현명했다. 그녀와 매제는 새집을 마련했고 어린 조카를 키우며 그 가게가 그들의 전부였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작은 오빠를 거둘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러한 쓴 경험이 내게 필요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드니 잠이 안 왔다. 벌떡 일어나 칠흑 같은 Hwy 64를 무작정 8시간 질주 해서 테네시 본사에 도착할 무렵 첩첩 산언덕 사이 햇살이 올라왔다. 융자 담당 여성 데스크에는 딸들과 찍은 정다운 사진이 간결하게 놓여있었다.
나도 딸 둘이 있다며 이 다운 페이는 딸들의 대학 적금 그리고 보험금 깨고 들고 온 것이라고 하자 그녀가 서류를 들고 상사에게로 갔다. 융자 조건은 지금이라면 걷어찰 내용이었다. 당시 모자라는 다운 페이와 보증인 없는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서류에 사인했다. 10년에 달하는 긴 융자 기간에 높은 이자율이 내 목에 거는 동아줄 같은 존재였고 그 길고도 험악한 상환기간 동안 부단의 노력을 했고 모두 갚았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작한 세탁 공장은 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큰 역경이었지만 사업가로의 변신의 모태가 되어주었고 12개의 세탁소 와 17개의 옷 수선 사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유일한 백악관 세탁소도 영업하는 성공 스토리를 쓰며 미국 최고의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옷을 다루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목에 찬 목 시계는 아름답다. 이겨낸 역경 장식용과 같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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