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걸의 필동멘션 - 나이를 구분하는 뜻밖의 기준
▶ 나이를 구분하는 뜻밖의 기준
12월이 오면 지구에서 보낸 매년이 얼굴에 나타난다. 동시에 한 해의 풍부한 시간이 다 지나갔다는 사실이 애석해진다. 가끔은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집중이 모든 것을 망치기도 한다. 고통에 대한 공포가 고통을 증가시키듯이 나이 먹는 두려움은 더 나이 들게 하니까.
나이는 부정적인 시간이라는 오랜 인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나이가 축하 받을 단계라는 나이 르네상스의 새 관념 역시 철저하게 사실과 달랐다. 우리가 합의한 생물학적 나이만이 나이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이는 들출수록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남편과 아내는 소파 반대쪽 끝에 쭈그려 앉아 있다. 그들 부부는 나와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인데, 분쟁이 불거질 때마다 나를 불러 하소연한다. 나는 중재의 재능도 없을뿐더러 사랑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고역스러워 하면서도 대체로 붙들려 있는 축이다.
고통은 마주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고, 문제에 집착한다는 건 풀 수 있는 기회를 서로에게 준다는 의미이고, 결국 그들 둘다 관계를 개선시키고 싶은 거라고 굳이 이해하고는 번번이 그 자리에 불려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착한 성격도 아니면서.
이번 싸움은 꼬인 일정 때문에 격화되었다. 아내가 친정 아버지 생신에 가야 한다고 말한 날, 남편이 하필 그날 친구들과 고성에 서핑 간다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장인 생신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고, 휴가를 갈 수도 없는 이 시국에 친구들 넷이 일정을 맞추느라 큰골 작은골이 다 해졌다고 했다.
아내는, 자기는 시아버지 생신을 머릿속에 다 저장해 두었고, 한번도 거른 적 없으며, 서핑은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남편이 아닌 나를 보며 작지도 않은 눈을 부라렸다. 둘은 그간의 비참한 헌신을 자세히 나열하다가 동시에 합창을 했다. “나 결혼 완전 잘못했어!” 그리곤 솔로몬이 될 생각도 없는 나의 판결을 기다렸다. “네가 좀 말해봐. 진짜 누가 맞는지.”
카페는 너무 어두웠다. 지금 나오는 가수 이름도 모르겠다. 소파도 너무 불편하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
그들은 누가 봐도 웬만큼 사회문화적 지점이 있는 고기능의 성인들이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으로 으르렁대는 결혼의 어느 찰나, 남편은 기초적인 부모의 의무에도 시무룩하게 저항하며 열 살의 지능을 보인다. 그의 아내는 오뉴월 암소 혀보다 길게 늘어지는 자기의 유아기를 스스로도 감당 못 해 까무러친다.
그녀는 알고 있다. 고통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좋은 핑계라는 걸. 그래서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지 않고 그동안 상처 입다 못해 옹이가 생긴 마음을 남편이 알아서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것이다. 남편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피하는 족속이니까.
그들은 내가 왜 그 자리에 나와 앉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품이 넓은 어른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나이 들었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그 살아 있는 표본이야. 그들에게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남들한테 대놓고 충고할 만큼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 있나?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예수도 수 틀리면 성전 앞에서 환전상들을 채찍으로 때렸고, 간디도 아버지 상중(喪中)에 들끓는 욕구를 어쩌지 못해 시신을 안치한 바로 옆방에서 소녀와 화간(和姦)하지 않았나.
더러운 농담에 매달리는 사회에선 우리 중 누구도 균등하게 성장하지 않는다. 시계를 되감아도 열일곱 살로 돌아갈 순 없지만 크리스마스에 부모님 집에 가면 십 분 내로 열일곱 살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한 신체 나이가 아니라 감정적인 나이를 살기 때문에. 이때 감정적인 나이는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에 따라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 네 개로 구분되는 것 같다. 분류하고 보니 딱히 별다를 것도 없지만.
감정적인 유아기는 단순히 설명하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을 취할 때까지 칭얼대고 얻은 뒤에는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원시적인 “나를 먹여 줘” 전략은 대놓고 효과적이다. 유아기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갖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감각은 무디다. 문제는 그런 성향이 관계의 낭만성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서 왜 그래?” 라면서 다투는 커플은 유아기에 사로잡힌 족속들의 특성을 처절하게 드러낸다. 타오르는 관계조차 영유아의 애착 관계로 돌려놓는. “넌 내가 갖고 싶은 걸 가졌지. 근데 난 네가 가진 바로 그게 필요해….” 오직 고유하게 떠받들여지는 유아들만이 단독으로 사랑 받는다.
감정적인 아동기는 주변에 관심과 도움, 돈과 사랑의 원천을 조절하는 강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모든 관계에 동등함을 느끼진 않지만, 약삭빠른 데다 타협할 줄 아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타고났다. 그 행동의 저 아래에는 “내가 원하는 걸 네가 갖고 있으니, 그걸 너한테서 뺏을 방법을 찾을 거야” 하는 마음이 흘낏댄다. 그들은 직접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하게 하는 방법을 주로 쓴다. 사랑스럽고, 즐겁고, 요구가 많고, 떼를 쓰면서도 쉽게 받아먹는 것은 아동기만의 매혹이자 트릭인 것이다.
어느 순간, 징징대는 것과 구슬리는 것 사이 어디쯤에서 헤매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런 사람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곁에 있는 사람들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몰래 제멋대로 저질러 버린다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비난을 피하려고 쉬파리처럼 정신 없이 핑계를 찾는다거나 하면 아동기로 되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당신은 그 보상으로 원하는 것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엔 멍청이가 된 자신을 탓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감정적인 청소년기는 타인들의 존재를 더 또렷하게 느끼지만, 인지하는 권력을 그렇게 편안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서열을 앞뒤로 뒤집다가 가끔은 대가와 상관없이 완전한 독립을 외치기도 하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갈망한다. “누가 한번만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 밀어주면 저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갈 텐데….” 즉, 감정적인 청소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원한다, 그리고 가끔은 같은 논쟁을 하며 둘 다를 원한다.
관계의 양면성이야 말로 감정적인 청소년기의 허들이다. 만약 당신이 주변 모든 관계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애증으로 얽히고 설켜 있다면 그건 의식 속에서 청소년기에 매달리고 있거나 헤어나기 힘든 상황에 포박되었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매사 경직된다면 더는 논쟁의 포인트가 없다. 그 힘을 우기고 따지는 데 다 썼으니까. 이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십 대로 돌려놓는다면 이미 그 싸움에서 졌다고 봐야 한다.
감정적인 성인기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인식하는 한편, 친한 사람들과도 갈등할 수 있으며, 그들이 때로 나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한다는 것까지 이해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친정 아버지 생신 날 서핑에 낚시까지 꿈꾸는 남편의 기백조차 얼추 용납할 것이다.
감정적인 성인기 속에서 노련하게 헤엄치는 남편이라면 처가의 대소사에 빠지는 것이 그들 기분을 잡치게 하리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랬다면 그 부부는 서로 만족하거나, 이번만큼은 한 쪽에 양보하거나, 보다 향상된 협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주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면, 당신이야 말로 딱 그런 사람이다.
무력감이나 저항감 없이 타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숙기의 인간일 것이다. 그런 멋진 모습을 남들 말고 자신에게도 좀 보여달라고 스스로 매일 조르겠지만.
기회는 변화의 다른 측면에 존재한다. 분별없는 행동을 통해 자기를 들여다보는 데는 무척 의식적인 자각과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른스러움의 이성적인 자취는 그의 존재감을 불 밝힌다.
아내에게 지난 달 저지른 죄에 대한 지불을 하면서 자신에겐 이 여자가 자기 엄마가 아니라 아내라고 주지시키는 남편, 실망과 연민을 숨기며 남편 더러 그렇게 누워만 있지 말고 바람 좀 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차분히 강요하는 아내. 성인기의 배우자는 역시 상대에겐 굉장한 초대이자 횡재이다. 그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만.
나이는 오랫동안 우리의 진정한 인명 사전이었다. 이제 나이의 의미는 혁명적으로 바뀌었고, 나이의 재정의는 다른 사회 운동에 견줄만한 파괴력을 지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불변의 진리가 하나 더 있다. 나이는 우리가 특정 시간에 한 일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두 개의 거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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