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군으로서 베를린에 있을 시기, 아내가 될 그녀는 동 베를린에서 이렇게 혼자 기념 촬영하고 있었다. 뒤편에 김일성과 동독 서기장 호네커 사진, 북한식 구호가 인상적이다. 혹시 그때 베를린 버스에서 보았던 그녀가 아닐까?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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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다란 말인가
당신은 인생을 후회하는가? 아니면 인생 이게 겨우 다인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가? 그것도 아니면 당신의 인생을 만족하며 살아가는가? 힘든 질문이다.
나의 경우 후회도 많고 아쉬움은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현명한 아내는 항상 만족하며 살라고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내 인생에 가장 아쉬운 점은 내 와이프와 마흔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만나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7080시절 만나서 결혼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 시절 우리는 혹시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동선이 달라 보고서도 지나쳤고 또다시 만나서도 기억 못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하늘의 해와 달도 시간과 공간이 서로 맞아 떨어져야만 월식과 일식이 가능하듯이 사랑하는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 역시 시간과 공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후회와 아쉬움도 적고 내 삶이 더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세상 최고 바보가 아내와 자식 자랑하는 남자라 한다. 그렇다 나는 바보다. 당신 역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났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란다.
# 성모병원, 명동성당, 계성여고(1970’)
청소년 시절 명동성당과 바로 옆에 있던 계성여고 주위를 많이 걸어 다녔다. 특히 명동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 성모병원에서는 미국 이민 절차 중 하나였던 X-Ray도 찍고(결핵 확인을 위해서) 그 병원에는 어머니가 한국전 당시 간호사였을 때 닥터로 모시던 분이 계셔서 가끔 들렀다.
어린 중학생이던 나는 병원에서의 기다림이 지루할 때면 명동성당 안을 배회하거나 계성여고 담 길을 따라 걷고는 했는데 아무런 근심 없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내게 형용하기 힘든 평화를 선사했다.
# 서울을 대표하던 31빌딩(1980’)
70년대 당시 서울의 최고층 빌딩은 청계천 고가도로 옆에 있던 31빌딩이었다. 성냥갑 같은 검은 유리벽 건물은 7080시대 서울을 대표하는 건물이었다. 당시 가발 무역을 하시던 아버님이 미국으로 떠나시고 수출 책무를 도맡아 하시던 어머니는 당시 31빌딩 안에 있던 Bank of America에서 발부하는 LC(신용장)를 받기 위해 그 은행에 가셨다.
하루는 미군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그 은행에 동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왜?” 하고 묻자 “너 미군 군복이 잘 어울려, 그리고 영어 잘하니까 나하고 같이 가자” 하시면서 앞장섰다. 우리 부모세대는 인생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셨다.
31빌딩은 건물에 비해 주차장도 없어서 건물 앞이 무척 번잡했다. 당시 Bank of America는 보통 한국은행들과 달리 은행원 창구 업무(Bank Teller works) 없이 LC 등 무역에 관한 업무만 하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고급 변호사 사무실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담당 한국 여직원과 책임자로 보이는 미국인에게 미 군복을 입을 나를 아들이라고 소개하셨다. 그렇게 하면 LC가 잘 풀릴까 하는 바람이셨던 모양이다. 서류만 검사하는 그들에게 미군으로 근무하는 젊은 청년이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여하튼 그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사무실과 영어에 유창한 젊은 담당 여성분이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입가 미소를 지었다.
# 버스 안의 동양 여인
미군 소속으로 나토 군사 훈련에 참가했다 목격한 베를린의 그 시계탑은 젊은 군인에게 전쟁의 상처와 그 처참한 후유증을 증언하는 듯했다. 당시 베를린은 화려했던 독일의 영광은 뒤로한 채 연합군과 소련이 점령 관리하는 비련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나는 빌헬름 황제 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 시계탑 앞을 미군용 지프를 타고 지나다녔다.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제복과 견장이 뜯기어 나가고 온몸에 화상을 입고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듯한 교회는 베를린 시민들로부터 ‘충치(hollow tooth)’라 불리고 있었다. 썩은 충치를 입안에 물고 살아가야했던 그들의 고뇌가 보였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교회를 헐지 않고 있었다.
북동부 독일 특유의 습기 찬 날씨가 화마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짓눌리는 듯 보였다. 외벽에 붙어있던 시계 바늘은 고목 가지 비틀 듯 고장 난 상태였고 바로 근처에 그 유명한 분단의 상징인 ‘철의 장막’ 베를린 벽이 동서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유명한 Charlie Point 초소 근처에서 근무하며 동 베를린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 안을 검색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한번은 동양 여인 한명이 버스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AK 총부리 들고 서있는 동독 군인에게 눈길을 돌려야만 했다.
# 조달청과 DC 경찰국 건물
1990년대 나는 DC 경찰국 1관구에서 경위(Lieutenant)로 근무했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사라진 그 경찰서 건물은 연방 조달청(L’Enfant Plaza)과 불과 100미터 거리, 딱 하나의 신호등 거리면 닿는 지척의 거리에 두 건물은 있었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근무시간에 조달청 건물 주위를 수천 번도 더 지나다녔고 랑팡 플라자(L’Enfant Plaza) 내에 있던 한인 캐리 아웃과 가게들도 많이 이용했다. 가끔 한인 상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출동해서 해결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허리띠에 연방 공무원증을 차고 당당히 활보하는 한인 여성들을 보면 같은 한인으로서 자랑스럽게 느껴지곤 했었다.
# 사진첩에서 만난 아내의 옛 모습
아내와 2000년 초기에 만나 연애하던 중 우연히 그녀의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명동성당에서 예배드리던 모습과 계성여중과 여고 그리고 성심대학(현 카톨릭 대학) 재학 사진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31빌딩에 있던 Bank of America에서 LC 담당했던 직원이기도 했다(얼굴 기억은 없지만 그때 만났던 그 직원 같기도 하다).
또한 내가 20년 근무했던 DC경찰국 바로 옆에 있던 조달청(GSA)에서 연방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그녀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진은 그녀가 젊은 시절 동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동 베를린 방문을 기념한 현수막 앞에서의 사진은 당시 내가 서 베를린에서 잠시 군인으로 머물던 시기와도 일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만남은 우연들이 아닌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한국인 미군으로서 베를린에서 근무한 것도 특이했지만 한인 여성으로 동 베를린을 방문한 사람도 아마 극소수였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 다른 행성으로 돌고 돌다 이제야 결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교회 시계탑 앞을 수많은 시민들이 별 관심 없이 지나쳤듯이 우리는 혹시 가까운 사람들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모두 우연이 아닌 필연들 아닐까? 사랑하는 타이밍은 지금이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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