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민재는 L 라인의 종점 카너씨 록어웨이 역에서 내려 베넷 블러바드를 한참 걸었다. 이곳은 브루클린 중심에서 꽤나 먼 곳이었다. 가로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앙상한 가로수가 있고 폐차장에 있어야 할 찌그러진 자동차 몇 대가 대로변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길 양쪽으로 건조하게 늘어진 박스 형태의 낮은 공장들은 이가 나간 창문 몇 개와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되었거나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정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플로이드 스트릿에서 왼쪽으로 꺾어 베넷 블러바드를 벗어나면 녹음실이 있는 폭이 좁은 삼층 건물이 나왔다. 화재 비상계단이 위태롭게 매달린 이층과 삼층에 ‘RENT’라는 글자가 몇 년째 붙어있는 주택 형 건물이었다. 여성의 나체 벽화만 없었다면 임대가 곧잘 나갈 만도 했다. 그런데 집 주인은 벽화를 그대로 두었다. 슬럼화된 주변 건물에도 그래피티가 잔뜩 그려진 터인데다 누가 남긴 건지 모를 중년 여성의 나체 상반신은 개중 잘 그려진 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그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든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든 민재로서는 비어있는 건물이 퍽 다행이었다. 누군가 지하에서 올라오는 음악소리나 엠프의 진동을 못 견딘다면 골치 아플 게 뻔하다. 여차하면 녹음실 문을 닫아야 하거나 임대료를 올려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민재에게 요염한 표정의 저 중년여성은 순항을 기원하는 항해사들의 선수상(船首像), 뱃머리에 조각된 여신상 같은 것이었다. 그림이 보이면 집 주인이 계속 세입자를 찾지 못하게 해달라 기도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민재는 주택 출입구가 있는 건물 정면을 돌아 녹음실이 있는 지하입구로 들어갔다. 좁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 잠긴 쇠문을 열어 고정시키고 지하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켰다.
체크 무늬 카펫 위 유리 벽을 중간에 두고 두 개로 나눠진 하나의 공간이 눈 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디렉팅을 봐주고 있는 학생이 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민재는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설치된 유리 벽 왼쪽 공간에 가방을 던지고 푹신한 회전 의자에 몸을 던졌다. 빙그르르- 의자가 한 바퀴 반을 돌고 멈췄다. 손이 자연스레 인터페이스 위의 전원 스위치에 떨어졌고 장치에 불이 들어왔다.
민재는 입구 쪽을 한번 슬쩍 확인하고 볼륨 믹서를 올렸다.
쿵, 쿵, 쿵, 쿵.
녹음실이 진동했다. 스피커에 연결된 케이블이 피를 뿌리 듯 빈 공간에 비트를 깔기 시작했다. 민재는 의자 허리를 뒤로 한껏 젖혔다. 귀를 타고 들어가 정수리로 터져 나온 무언가가 사지의 세포 하나하나를 열었다. 다물었던 입술이 슬며시 떨어졌고 팔 등의 털이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자유롭다, 자유롭다!
갓 부화한 병아리의 끈적한 몸에서 달걀 껍질이 떨어지듯 오전의 식당 아르바이트에서 묻어온 음식 냄새가, 손에 남은 젖은 행주의 느낌이 떨어져 나갔다. 한 켠에 밀어두었던 나, 내가 흠모하는 내가 다시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무명 예술가.
언더그라운드 랩퍼.
가사로 기막힌 이야기를 지껄이니까 작가.
민재는 바닥 한쪽에 구겨져 있는 그의 검은색 배낭을 들어 가슴에 꼭 껴안았다. 가방 안엔 지난 주에 완성한 곡 하나가 있었다. 가사는 직접 썼고 비트는 삼백 불이라는 거금을 들여 할렘의 전문 비트메이커에게 받았다. 녹음을 하고 음원을 플랫폼에 올리기만 하면 민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곡이었다. 홈 레코딩을 했다면 진작 올릴 수 있었겠지만 이 곡은 반드시 작업실에서 제대로 녹음해야 했다.
대형 레이블 사의 스카우트들이 언더그라운드 랩퍼의 곡을 모니터링 할 때 듣는 시간은 곡당 단 10 초. 곡의 녹음 상태가 어설프거나 싸구려 비트를 사용한다면 5 초도 채 듣지 않을 것이다. 5 초면 비트가 깔리고 첫 마디 정도 뱉어질까 말까 한 찰나의 시간이었다.
민재는 언젠가 녹음실 장비를 대여해 준 엔지니어가 한 말을 떠올렸다. 배경 없이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원을 플랫폼에 자주 올려야 한다. 온라인에 자주 노출 되야 팬이 생기고, 공연 기회가 오고, 운이 좋으면 레이블 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받을 수 있다. 무명 시절에 음원 퀄리티에 매달리는 것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으니 무조건 곡을 많이 쓰고, 홈 레코딩으로 음원을 올려라…. 그의 충고에 민재는 한때 맨하탄의 이스트빌리지에서 오디오 일을 배웠던 것을 들먹이며 자신은 아마추어랑 듣는 귀가 다른데 홈 레코딩을 한 곡을 본인 이름으로 낼 순 없다고 했다. 코웃음을 치며 그가 말했다.
너 결벽증이야, 아니면 부자야?
주중에 민재는 한인 식당에서 일했다. 주말엔 타임스퀘어에 나가 조잡하게 만들어진 음반을 팔았고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같은 긴 명절엔 택배 일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녹음실과 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일주일 남짓이었다. 불안한 심정과 달리 녹음은 제한된 돈과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랩을 내뱉는 톤은 더 묵직해졌지만 가슴이 무거워질 수록 가사가 절박하게 쓰여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이 촌스럽게 들렸다. 기껏 작업실에서 녹음한 자작곡 몇 개가 그렇게 폐기됐다.
그즈음 한국에서 랩과 힙합이 케이블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인해 주류로 떠올랐다. 멜로디 없이 랩으로만 된 곡이 가요 차트 상위를 차지하고 각종 버라이어티 쇼에 랩퍼 들의 화려한 삶이 조명됐다.
어렴풋이 민재가 하는 일을 알던 친구들이 연락이 잦아졌다. 이후엔 생각지도 못한 제안들이 쏟아졌다.
아는 동생이 랩에 관심 있다는데 한번 가르쳐 볼래?
지인이 방송에 데모 음반 보내고 싶다는 데 도와줄 수 있어?
아는 동생, 지인들이 가져온 돈 봉투가 삶을 크게 나아지게 하진 않았다. 하지만 식당엔 오전 근무만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녹음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켰다.
녹음실에서 오래 머무르다 보면 그의 컨디션이 최고조일 때 본인 곡의 녹음도 이뤄질 것이다. 유리 벽 오른쪽의 녹음실보다 오디오 스테이션이 있는 반대쪽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민재는 예술가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결국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의 메이…. 학생을 받게 됐다는 말에 그녀는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의 재작년 연말 공연 포스터가 붙은 벽에 걸린 시계가 정각을 가리켰다. 계단을 내려오는 촐랑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 화려한 셔츠 위로 금빛 액세서리를 걸친, 모자를 뒤집어 쓴 학생 하나가 녹음실로 들어왔다.
민재는 가슴에 품고 있던 배낭을 오디오 스테이션 안쪽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Ⅱ “그 학생 너무 웃겨.”
메이가 납작하게 튀겨진 중국식 만두를 집으며 낄낄댔다. 민재는 일주일에 두 번 녹음실을 찾는 랩퍼 지망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지망생은 민재가 내준 가사 써오기 숙제에 개 얘기로 노트 한 페이지를 채워왔다. 잔뜩 기대했고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엄마가 사주지 않았다. 절망했고 상처받았다, 등등. 나름의 원망과 배신감이 제법 전투적으로 쓰여져 있더란 말에 만두 기름에 젖은 메이의 입 꼬리가 다시 빙긋 올라갔다.
“왜 진작 가르칠 생각을 못 했을까?”
민재는 볶은 시금치 요리와 청경채가 올라간 국수 두 그릇이 식탁에 내려오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사실은 지금도 남을 가르치고 있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게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입에 맴돌다 만두 한 조각과 함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메이의 젓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난달까지 입덧을 심하게 앓았던 그녀의 얼굴은 광대뼈 아래쪽이 아직 한 움큼 패여 있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깊은 헛구역질을 해대던 그녀는 임신 중기에 들어서자 180 도 달라진 왕성한 식욕을 드러냈다. 둘은 수 년째 인디고 색의 나무 간판이 걸린 차이나타운의 이 음식점을 단골 삼아 다녔지만 이전엔 국수 두 그릇 이상을 시켜본 적이 없었다. 국수 그릇을 비우고 마늘기름에 볶은 시금치를 아쉬운 듯 앞 그릇에 쓸어 담는 그녀를 본 민재의 시선은 자연스레 볼록해진 아랫배를 향했다.
그녀의 몸 안에 민재와 메이를 반씩 닮은 것이 자라고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며 메이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민재가 펄쩍 뛰자 자신이 내린 결정이니 부담 주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뿐이었다. 메이는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였다. 가냘픈 몸 어디서 그런 씩씩함이 나오는 지 매사에 똑 부러졌다. 메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안도감을 주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가 커질 수록 민재와 메이의 세상, 그 지평에 놓인 모든 것의 기울기가 임신이라는 주제를 향해 각도를 키워갔다. 그녀의 식성도 외모도 바뀌었고, 관심사도 대화의 주제도 달라졌다.
민재는 그가 그녀를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먹는 게 시원치 않네.”
앞 접시에 담은 음식까지 싹싹 비운 메이는 그제서야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를 보았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래? 말을 하지. 아, 민재야. 나 오늘 병원 갔다 왔는데….”
메이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지갑에서 빳빳하게 코팅된 의료보험 카드를 꺼냈다. 중국계 무역 사무실로 직장을 옮긴 후 자랑 삼아 보여줬던 카드다. 웬만한 치과 치료도 다 보장된다며 좋아했던 게 아직 눈에 선했다.
“병원도 자주 다니니까 보험은 있으나 마나야.”
메이는 식당 테이블에 보험 카드를 패대기 치며 말했다.
“유전자 검사를 해야 된대서 들어보니까 비용이 자그마치 900 달러래. 60 프로, 70 프로 보험 처리 되도 내가 내야 될 돈이 이래저래 삼백 불 정도 되는 거더라고.”
“삼백 불?”
“응. 넘을 수도 있고.”
“유전자 검사가 뭔데?”
“뭐라더라. 애한테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 검사하는 거라던가. 염색체 번호 몇 개를 검사해 보면 애 나오기 전에 기형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더라고. 듣고 나니까 안 할 수는 없는 검사 같고.”
“아….”
“그런데 의사 말하는 태도가 기분이 나빴어.”
“왜?”
“이 검사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97 퍼센트 확실한 거고, 다른 하나는 99 퍼센트 확실한 검사야. 그런데 99 퍼센트 확실한 검사는 천불이 넘어. 그래서 난 97 퍼센트 확실한 검사를 하겠다고 했지. 물론 거기서부터 기분이 나빴어. 돈 내고 하는 검사면 다 백 퍼센트 확실하게 해야지 97 퍼센트는 뭐고 99 퍼센트는 뭐람?”
“….”
“아무튼 내가 97 퍼센트 하겠다고 했더니 의사가 97 퍼센트 검사를 선택한 데 따른 위험 부담은 개인이 져야 한다는 거야. 내가 어디서 화가 났는지 알겠어? 이건 검사를 하기도 전에 잘못될 경우부터 생각하는 거 같잖아. 정말 잘못되면 내 책임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거고.”
“음….”
“또 있어. 내가 위험 부담 얘기를 듣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대뜸 대고 ‘35 살 넘으셨죠?’ 하는 거야. 그렇다고 했더니 35 살 넘은 고 위험 임산부는 다들 99 퍼센트 검사를 한다는 거야. 97 퍼센트 선택하는 임산부는 본 적이 없대.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다 늙어서 임신했으니 애한테 죄책감 갖고 돈 아끼지 말아라 이거야? 이런 게 강매가 아님 뭐야?”
메이는 플라스틱 컵에 담긴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병원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실제 진료는 고작 15 분인데 대기실에서 매번 한 시간씩 기다리게 만들어. 초음파실에는 갈아입을 일회용 속옷도 없고. 그런데 나이까지 들먹이니까 참을 수가 없어. 내가 외국인이라 그러나?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해?”
민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자 서른 다섯이 이런 대접 받을 나이인가 생각하면 서글퍼져. 다른데도 아니고 뉴욕에서 말이야. 사무실에 마흔 넘은 언니들이 수두룩하다고! 대학 마치고 유학 와서 또 공부하고, 일하고, 월세 내면서 학자금 갚다 보면 금방이야. 저축해놓은 돈이 없으니 결혼은 미뤄지고, 애는 더 나중이지. 안 그래?”
“그런가?”
“민재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잘 몰라. 아무튼 이 미국이란 나라가 그래. 돈은 돈 대로 내면서도 푸대접 받기가 일쑤야.”
메이가 빈 물 컵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민재가 컵에 물을 따르는 사이 식당 테이블 위에 계산서가 놓였다. 민재는 계산서를 보고 국수 한 그릇 값에 세금 십 프로를 더한 현금을 내려놓으려다 십 달러 지폐 한 장을 더 내려놓았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네.”
메이가 계산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계산서에 적힌 금액과 민재가 내려놓은 현금을 번갈아 보고 지갑에서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내려놓았다.
“어제 집에서 연락 왔었어.”
종업원이 계산서를 가져갈 수 있게 테이블 끝으로 계산서를 밀며 메이가 말했다.
“임신한 거 결국 얘기했더니 뉴욕으로 보러 온다네.”
그녀는 민재의 얼굴을 흘끔흘끔 살폈다.
“아빠 오면 한번 볼래? 부담스러우면 괜찮고.”
“….”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서 물을 찾던 민재는 방금 계산서와 돈을 집어간 종업원이 물병과 빈 컵도 가져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상 위에서 양손을 맞잡아 깍지를 꼈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인사는 드려야지.”
“그럴래?”
메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아빠한테 그렇게 말해둘게.”
메이는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메이는 가게 문을 나서자 마자 민재와 팔짱을 꼈다.
“아, 그리고 이건 별건 아닌데. 아빠한테 민재를 선생님이라고 소개했어.”
메이가 말했다.
“선생님?”
“응. 학교는 아니니까 강사라고 할 걸 그랬나?”
“….”
“에이 뭐. 선생님이나 강사나 그게 그거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는 민재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더 깊은 팔짱을 꼈다.
Ⅲ 오전에 일하는 식당은 이스트 할렘의 시나이 병원 근처에 있었다. 이곳엔 고만고만한 크기의 중식당과 타이음식점, 달러 피자 가게가 몰려있었다. 주요 고객이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 환자의 가족들이어서 점심 시간엔 가게 앞 길이 제법 붐볐다. 민재의 한인 식당에 4 인용 식탁 6 개와 2 인용 식탁 두 개도 비어있을 틈이 없었다. 그의 오전 근무는 점심 장사와 그 이후의 설거지, 내부 정리 등을 포함했다.
식당은 한인 부부가 운영했다. 아주머니는 카운터를 보았고 아저씨가 주방에서 요리를 했다. 아저씨가 관절염으로 병원을 다니기 이전엔 비빔밥과 돈까스, 분식류와 찌게 등 메뉴가 다양했다. 아저씨는 작년 겨울 결국 수술을 받았고, 부부는 식당 주방 보조를 구하는 대신 부대찌개와 샤브샤브 같이 주방에서 따로 요리할 필요가 적은 음식으로 메뉴를 바꿨다. 다행히 매출은 줄지 않았다. 민재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인분씩 샤브샤브 재료를 다듬어 놓는 아저씨를 돕고 식당 테이블을 닦고 나면 얼추 점심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밀려들기 전의 짧은 여유시간에 아주머니는 기계에서 뽑은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권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홀 안에 한 테이블 정도 손님이 들어와 있어 벽에 엉덩이를 기대고 쉬고 있으면 아주머니는 태도가 잘못 됐다며 주의를 주곤 했다. 무뚝뚝한 아저씨와 달리 민재는 아주머니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자기 얘기도 곧잘 했다. 둘은 금방 친해졌고 오지랖이 넓은 그녀는 그의 진로에 대해 이것저것 훈수를 두기도 했다. 민재가 지망생들의 디렉팅을 맡으며 저녁 일을 못나오겠다고 하자 흔쾌히 알았다고 한 것도 아주머니였다. 대신 식당은 저녁 장사를 한 시간 일찍 접었고 아저씨도 불만이 없었다.
“너 꽃집 아줌마 기억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가을까지 식당을 꾸준히 찾던 여자가 있었다.
항상 꽃 한 단씩을 들고 와서 식당 아주머니와 민재는 그녀를 꽃집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녀는 실제로 미드타운의 한인 슈퍼마켓 옆에서 꽃 가게를 작게 운영하고 있었다. 데이지와 백합, 튤립과 연 분홍빛 카네이션 등 그녀가 가져오는 꽃은 시나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딸을 위한 것이었다.
“그 아줌마 작년 말부터 한참 안보였잖아. 혼자서도 오고 가끔 딸도 병원에서 데려오던 사람이.”
“그랬죠.”
민재는 팔과 다리가 유독 희고 가늘었던 꽃 집 아줌마를 떠올렸다. 코트 안으로 암 병동 환자 복을 입은 그녀의 딸 역시 피부가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희었다.
“그 집 딸 결국 죽었대.”
“네?”
민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단골 중에 한인 간호사 하나 있잖아. 식당 문 닳도록 오던 사람이 하도 안 오길래 그이한테 물어봤지. 아줌마랑 그 집 딸 아느냐고. 잘 있냐고. 그랬더니 갑자기 목청을 높이면서 ‘어머, 모르셨어요?’ 하잖아.”
아줌마는 한기를 느낀 듯 어깨에 걸친 숄을 목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죽었다는 거야 글쎄. 벌써 죽었다고.”
민재는 꽃 집 아줌마와 주고 받았던 짧은 대화들을 기억하려 눈썹을 찡그렸다. 따님은 좀 차도가 있냐 물어볼 때면 ‘하루 좋고, 하루 나쁘고 그래요.’ 라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 후의 쓸쓸한 웃음은 어쩐지 고상한 구석이 있었다.
“안됐네요. 딸이 어려 보였는데.”
“응. 한국 나이로 갓 중학생 됐나 그랬어.”
아줌마가 맞장구를 쳤다.
“간호사한테 얘기 더 들어보니까 딸 유학시킨다고 기러기 부부로 지냈는데 딸 아프면서 남편이 생활비를 제대로 안 보냈다지? 나쁜 놈. 모아뒀던 돈으로 아줌마가 가게도 꾸리고 여기저기 일도 다녔었는데 꽤나 힘 들었나봐. 딸 죽고 밀린 병원비 지급 할인 요청하면서 나온 이야기야. 이젠 가게도 집도 없다고 했다 더라.”
“….”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이미 가지 않았을까요?”
민재가 컵에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주머니는 빈 종이컵을 손 안에서 꾸깃꾸깃 접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삼삼오오 사람들이 들어왔다.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주머니는 방금 한 대화는 잊어버리라는 듯 민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민재는 얼얼한 기분으로 점심 시간을 정신 없이 보냈다. 청소를 마무리하자 오후 3 시였다. 부르는 소리에 주방에 가보니 아저씨가 샤브샤브 재료를 포장한 비닐 봉지 하나를 쑥 내밀었다.
“메이 갖다 줘. 이인 분이야.”
뜻밖의 호의에 민재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줌마한테 메이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부부가 대화를 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저희 같이 안 살아요. 일 인분만 가져다 줘도 되는데.”
민재가 봉지를 받으며 말했다.
“너 말고. 메이가 두 사람 몫을 먹어야지. 애까지 사람이 둘인데.”
아저씨는 셔츠의 가슴에서 담배 갑을 꺼내 주방 뒤쪽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사라졌다. 민재가 떠나고 식당 아주머니는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팻말을 문 앞에 걸었다.
Ⅳ 민재는 퀸즈 행 지하철을 탔다. 집에 잠시 들러 줄게 있다는 문자에 메이는 신이 난듯했다. ‘꽃? 선물? 음식?’ 물음표를 달은 문자가 휴대폰을 쉴새 없이 울렸다. 민재는 메이에게 꽃을 준 적도 선물을 사준 적도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민재가 꽃이나 선물을 사올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민재가 선물을 사왔다 해도 왜 쓸데없는 데 돈을 썼냐며 핀잔을 줬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달라지고 있다.
메이를 만나면 민재는 평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얘기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 얘기도 하고싶지 않았다. 얘기가 길어지면 꽃 집 아줌마의 죽은 딸 얘기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럼 민재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도 꽃 집 아줌마의 불행 위에 자신의 실루엣을 겹쳐 볼지 모른다. 민재는 딸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 생활비를 끊었다는 아줌마의 남편을 생각했다. 그는 애초에 딸을 원했을까. 딸의 유학은 누구의 의지였을까. 그에게도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나쁜 놈.
메이는 식당 아주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곁에서 그렇다, 그는 나쁜 놈이다 라며 맞장구를 쳐야겠지. 그에게도 그가 바란 꿈과 삶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은 입에서 꺼낼 수도 없을 걸.
민재의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메이가 아버지를 만날 때 입을 만한 정장이 있냐며 묻는다. 없으면 이번 기회에 한 벌 사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민재는 답변하지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다시 휴대폰이 진동한다. 또 메이인가 싶어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확인 버튼을 누르는데 어제 수업을 한 지망생이다. 학생은 한국에 있는 레코드사에 데모곡을 보낼 기회가 생겼다며 급히 곡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혹시나 선생님이 미리 써놓은 곡이 있으면 가격이 얼마가 되든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도 밝혔다.
민재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샤브샤브 이 인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학생의 문자를 한번 다시 읽고 등에 메고 있던 검은 배낭을 가슴 앞으로 가져와 깊숙이 안았다. 머리 속에는 아직도 식당 아주머니의 ‘나쁜 놈’ 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었다.
당선소감 | 준 여
첫 아이 임신으로 배가 한참 불러가던 올해 초‘이인용 식사’를 썼습니다.
제법 익숙해진 외국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타지에서 뱃속의 생명을 키우는 일이 녹록치 않더군요. 제 꿈과 아이의 건강, 가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느니 글을 쓰자며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소설 속 민재의 고민과 메이의 불안함이 저의 고민과 불안을 닮은 이유는 이 때문일 것입니다. 공모전을 위해 글을 쓰는 일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 아이가 건강히 자라 친절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처럼 제 글 또한 내용과 형식면에서 더 건강하고 따뜻한 글이 되길, 그래서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들 안의 친절함을 타인에게 더 베풀게 되길 바랍니다.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 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편소설 부문 심사평
주변 인물의 사실적이고 적절한 배치
은희경 <심사의원>
올해의 응모작들은 비교적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준 여 씨의 <이인용 식사>는 단연 돋보였다. 무명 뮤지션을 둘러싼 현실, 그리고 주변 인물의 에피소드가 사실적이고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절제된 서술과 무리가 없는 이야기 전개도 소설의 가독성을 높였다. 특히 개인의 꿈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균열이나 긴장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주인공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현실을 잘 포착해서 섬세하게 재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말을 안이하게 처리한 느낌은 있지만 <이인용 식사>라는 다소 반어적인 제목이 작가의 소설적 감각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결론지었다.
김병권 씨의 <어느 개장>은 제목 그대로 다시 장사를 지내는 이야기이다.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한국을 방문해 이모의 묘를 개장하는 과정이 씨줄이라면, 그 죽음에 얽힌 숨겨진 사연이 날줄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정교하게 짜여져 인간의 인연과 운명이라는 그림을 펼쳐 보인다. 다만 정형적인 사연과 정제되지 않은 문장이 이 소설을 다소 진부하게 만든 점이 아쉽다.
김명순 씨의 <나비 : 죽음을 넘는 희망의 나비>는 노년과 병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재도 문장도 평이하지만 거기에 낯선 남자를 등장시켜서 그 가까워짐과 멀어짐의 과정을 통해 노년과 병을 해석하는 작가만의 사유를 드러냈다. 내적 독백이 섬세하되 장황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지만 지나치게 사적 영역에 머무르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위의 두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했다.
그밖에도 윤금숙 씨의 <아파트 세인트 캐서미아>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디테일이 치밀하고 또 그 변주가 풍부한 작품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작가의 관점을 개진하기보다는 이야기를 편집하는 데에서 그친 느낌이 들었다. 김상국 씨의 <얼음이 깨지면> 역시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어나가고 인물 설정이나 세부 묘사에도 솜씨가 있지만 당선권에 들기에는 다소 상투적인 전개였다.
문학은 현실을 작가의 관점으로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실이 힘들 때 문학 작품은 더 다양한 각도로 삶을 모색하고 사유하게 된다. 인간을 위로하고 또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지면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내년에는 더욱 다양하고 개성적인 응모작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
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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