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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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과 인생에서의 ‘신의 한수’
아버님에게 감사히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그분이 가르쳐주신 바둑이다. 동양에서 바둑은 신선놀음이라 칭한다. 어린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치셨던 아버님은 상당 수준의 아마추어였다.
서양에서의 골프처럼 동양에서는 모양새와 매너를 중시하는 게임이 바둑이다. 신속성에 목숨을 건 현대사회에서 ‘두터움’을 강조하는 바둑이나 ‘기본(Fundamental)’을 내세우는 골프는 현실을 역행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살다 보면 ‘모양새’, ‘매너’, ‘두터움’ 과 ‘기본’ 이 필수임을 절실히 느낀다.
아버님은 내가 묘수를 보이면 ‘신의 한수’를 두었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런데 인생에서도 ‘신의 한 수’가 있다. 난관의 상황에서 ‘신의 한 수’로 인생을 깨끗하게 타개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그런가 하면 잘나가던 인생이 한 수의 ‘패착’으로 불행히 끝나기도 하며, 참으로 고된 인생을 깔끔한 ‘끝내기’로 인생 반전 하는 경우도 보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인생의 바둑을 두고 있는가? 내 인생 ‘신의 한 수’ 이야기를 하겠다. 그전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 경기고등학교를 포기한 사촌 형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대구에서 사촌 형이 상경하여 우리 집에 살았다. 큰 아버님은 가정사가 복잡했다. 대구에는 홀로 사시던 큰엄마와 외아들이 있었다.
아버님은 큰조카를 서울 집으로 데리고 와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최고의 명문이었고 사촌 형의 앞날도 창창한 듯 보였다. 그런데 그는 인생 최악의 ‘패착’을 둔다. 어느 날 오고 간다 말없이 사라진 것이다.
크게 놀라 사촌 형 방을 뒤져보니 큰엄마의 편지 한통이 나왔다. ‘너 없어 못 살겠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라’ 하는 내용이었다. 아버님이 그 길로 대구로 내려가 큰엄마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큰엄마는 장손을 자기 품에 끼고 있어야 본인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주위 여인들이 그렇게 해야 큰아버지가 돌아온다고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사촌 형은 경기고등학교를 포기하겠다는 답변을 했고 아버님은 두말없이 돌아오셨다. 사촌 형은 대구의 시장 근처에서 온갖 궂은 일들을 하며 심플한 생을 살다 갔다.
# 친목으로 시작한 모임, 끊임없는 술자리
20여 년 전 동업을 하는 사업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술자리와 포커 자리가 빈번해졌다. 자연히 와이프들과도 친숙해지고 골프여행, 각종 장비 쇼와 세미나도 같이 하게 되니 정기적 모임을 도모하는 계모임으로 발전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우리 집에서 노래방 술 파티 그리고 남자들의 포커 나이트가 열렸다. 포커 경기는 밤을 새는 경우도 흔했지만 사업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자주 찾아오는 손님들이 반가울 리 없었지만 아내는 웃음을 잃지 않고 한밤중에도 스낵과 음료수를 내오곤 했다. 우리들은 죽마고우 마냥 가까웠고 그중 핵심 멤버 몇 명은 의형제같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 나를 저버린 친구들, 그것에 대한 감사
어느 날 네 명의 ‘엑기스’와도 같은 친구가 커피 가게로 나를 불러냈다. 그들은 무슨 연유인지 나에게 모임에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권유했다. 그 계모임의 이름은 내 호에서 따온 것이고 내가 섭외해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었기에 섭섭했다.
그들의 이유 설명도 진부했고 이해가 안 갔다. 마치 굴러온 돌들이 박힌 돌을 빼낸 모양새였다. 소위 ‘계 오야’였던 나를 ‘쏙’ 빼서 무엇을 하려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그러나 O.K. 하고 답했다.
그 후 그 모임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내심 내가 놀란 것은 모임의 친구 중에는 30년을 알고 사귀던 사람도 있었다. 무엇인가 오해가 있으면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수년이 지나도 서로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서로 좋은 인맥이라 믿었던 나는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완전 ‘왕따’ 당한 것이었다. 그동안 ‘빈 삼각’ 인생을 살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과 대인관계에서 내 처신에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다는 고찰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떠나갈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서는 ‘수’가 느는 것임을 그때 알게 되니 그들에 대한 섭섭함은 오히려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옛날 만약 사촌 형이 우리 서울 집에서 계속 지냈다면 그 형의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결혼 까지도 고스란히 우리 아버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떠나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이르고 술 파티와 사교 활동(socializing)에 허비했던 귀중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시간 소비가 없다는 점이 고마웠다.
# 나의 ‘신의 한 수’
동고동락 하던 친구들이 떠나주니 자연스럽게 사업에 더욱 집념하게 되고 그 결과는 낮과 밤으로 달라지고 사업이 기하급속(exponential)으로 팽창했다.
그런데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르니 아내가 내가 하고 싶었던 학업을 다시 해보라고 조언했다. 인생에서 옆에서 말해주는 좋은 ‘훈수’만한 보배는 없다. 더군다나 배우자는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사실 겁이 살짝 났다. 나이가 이제 오십 중반, 그리고 내 학벌은 고 1 중퇴에 검정고시가 전부였다. 그러나 평생 예술학에 관심이 많았었다.
내가 대학진학을 결정하니 아내가 너무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무엇을 전공하겠느냐고 물었다. ‘예술학(Art History)’이라 했더니 깜짝 놀라며 너무 의외라는 것이었다. 본인 생각에는 ‘정치 외교’나 ‘저널리즘’ 같은 것을 내가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같이 사는 아내도 이런데 하물며 친구들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 나의 신의 한 수는 와이프의 훈수를 받아들여 조지 워싱턴대에서 장학생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조지타운대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게 된 것이다(나는 장학금이 필요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GW에서는 고학점 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제도가 있었고 막상 장학금을 받으니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졸업 후 그 이상의 장학금을 이미 모교에 헌납했다). 풀타임 학생으로 ‘형설지공’ 하는 동안 나는 계속 내 사업의 대표를 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 누구나 가능한 ‘신의 한수’
글을 쓰다 보니 내 자랑이 됐다. 사실 자랑스럽다. 그 이유는 그 과정이 고난의 행군이었기 때문이다. 고난이 따르지 않는 곳에 성취감도 없다. 역경을 이겨내야만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원했던 것을 배우는 데에서 오는 행복감이 좋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구들이 떠나가 준 덕택이다. 그리고 와이프가 해준 ‘훈수’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자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내 인생을 깨끗한 ‘끝내기’로 마무리 해주는 것이 남았다. 최고 최상을 향한 걸음을 도약하는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하며 자축기념으로 롤렉스 금딱지 프레지덴셜(presidential)을 구입해 차고 다녔다. 당신의 ‘신의 한 수’는 무엇인가?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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